네이버 사옥과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
“회사를 해오면서 기술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해외에 진출하는 사업 모델에도 자부심이 컸지만 그보다 더 큰 자부심은 새롭고 건강한 회사 문화를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 것에 있었습니다. 저 역시 대기업에서 처음 직장을 시작했던 터라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에 늘 관심이 많았고 여러분과 힘을 합쳐서 많은 새로운 시도를 해왔고 나름대로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만들어 왔다고 믿어 왔었는데 이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회사 문화와 관련된 문제이기에 제 부족함과 잘못이 제일 크다고 생각합니다.”

네이버를 창업한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가 지난 6월 30일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 사과문 중 일부다. 40대 한 직원이 오랜 기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다가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지 약 한 달 만에 이 GIO가 직접 진화에 나선 것이다. 이를 두고 2004년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은 뒤 대외활동을 최고경영자(CEO)에게 일임하고 있는 이 GIO가 네이버를 움직이는 실세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는 GIO 겸 라인 회장, 네이버·소프트뱅크가 50%씩 출자한 합작법인 ‘A홀딩스’의 대표이사 회장에 이름을 올리며 공식적으로는 경영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 해외 사업만 챙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네이버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들은 이 GIO가 글로벌 사업뿐 아니라 네이버의 거의 모든 서비스를 직접 챙기고 있다고 전한다. 이 GIO가 지분율을 3.73%까지 낮추고 사내이사에서 물러났는데도 대기업 총수(동일인), 즉 네이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으로 지정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KAIST에서 전산학 석사학위를 마친 이 GIO는 1992년 삼성SDS에 입사했다. 수십명씩 미국에 가서 인터넷을 배우면서도 막상 직접 만든 소프트웨어는 뒷전으로 하는 삼성의 현실을 보고 회사를 나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5년 간의 준비 끝에 1997년 3월 네이버의 전신인 사내 벤처 ‘네이버 포트’를 만들고 웹 검색 개발에 뛰어들었으며, 1999년 이 사내벤처를 네이버로 독립시키게 된다.

“비즈니스를 해온 경험을 토대로 봤을 때 인터넷 사업은 대포가 아니라 유도미사일입니다. 타깃을 잡아도 사용자가 계속 바뀌고 환경도 변하며 경쟁자도 나타납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목표를 잡고 쏘는 대포가 아니라 끝까지 추격하는 미사일이어야 명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정보기술(IT) 분야는 고객의 변하는 요구를 끝까지 맞춰가며 서비스할 수 있는 사업자의 열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016년 공식 석상에 모처럼 나타난 이 GIO가 한 말이다. 그의 집요함, 사업가적 근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창업 이듬해부터 일본 시장을 동시 공략, 수차례 실패에도 ‘라인(2011년)’, ‘라인-야후재팬과의 경영통합(2021년)’ 같은 성과를 내고야 만 것도 그의 리더십을 짐작하게 한다. 다만 이런 불굴의 리더십이 경직된 조직문화, 직원들의 이탈로 이어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 C레벨, 이해진 최측근으로 쏠림현상

‘보이지 않는 이 GIO의 리더십’ 전면에는 한성숙 CEO가 있다. 잡지사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한 CEO는 엠파스 창립 멤버로 검색사업본부장을 지냈다. 엠파스가 SK커뮤니케이션즈에 매각되면서 네이버의 전신인 NHN으로 자리를 옮겼고, 네이버 서비스 총괄 등을 거쳤다. 김상헌 당시 CEO가 물러나면서 2017년부터 네이버를 이끌고 있다.

조선DB

삼성SDS 출신으로 창업 초기부터 합류해 ‘이해진 GIO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최인혁 전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최근 직원의 극단적 선택 사건을 계기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다. 현재 COO는 공석이다. 다만 그는 네이버의 신규 핵심 먹거리 중 하나인 금융을 주력으로 하는 네이버파이낸셜, 해피빈재단의 대표 자리는 유지 중이다. 이에 대해 네이버 노동조합 측은 최 대표가 모든 계열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상진 최고재무책임자(CFO) 역시 삼성SDS 출신으로 창업 초기부터 네이버로 자리를 옮긴 ‘재무통’이다. 채선주 최고커뮤니케이션책임자(CCO)는 이 GIO,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등과 함께 일한 ‘IT업계 1세대’로 불린다. 2000년부터 네이버에 근무하며 회사 안팎의 각종 현안을 챙기고 있다. 이 GIO가 고민거리가 있을 때마다 의견을 구하는 최측근이다. 김범수 의장이 2010년 카카오 설립 당시 영입제의를 했지만, 네이버에 잔류해 이 GIO의 신임이 특히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IT 업계 관계자는 “직원의 극단적 선택을 계기로 네이버 조직 문화, C레벨에 과도하게 쏠려 있는 권한 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진 만큼 한성숙 CEO를 비롯해 일부 C레벨 교체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했다. 실제 이 GIO는 관련 이메일 사과문에서 “당장 어떤 책임이라도 지고 싶지만 회사의 새로운 구조가 짜여지고 다음 경영진이 선임되고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라면서 “늦어도 연말까지 해내야 한다는 이사회의 제안이 맞다고 생각한다”라고 경영진 쇄신 가능성을 밝힌 바 있다.

◇ 네이버 속 독립회사 이끄는 7명의 리더

현재 네이버에는 독립적인 사내기업(CIC·company in company) 7곳의 수장이 있다. 대부분 회사 초창기부터 각 사업에서 경력을 쌓은 전문가다.

검색 리더 김광현(서치 CIC 대표), 디자인설계를 총괄하는 김승언(아폴로 CIC 대표), ‘밴드’ ‘스노우’ 같은 커뮤니티 서비스를 담당하는 김주관(그룹& CIC 대표), ‘바이브’ 등 오디오 서비스를 담당하는 박수만(튠 CIC 대표), 장소 기반 서비스를 전문으로 하는 이건수(글래이스 CIC 대표), 커머스를 맡는 이윤숙(포레스트 CIC 대표), 인공지능(AI) 기술 등을 담당하는 정석근(클로바 CIC 대표) 등이다.

2015년 처음 도입된 네이버의 CIC는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별도법인으로 분사시키는 것이 궁극적 목표인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네이버 자회사인 네이버웹툰·네이버파이낸셜도 CIC 형태로 있다가 덩치를 키우면서 분사한 곳이다. CIC 대표는 관련 사업에 대해 독립적인 권한을 갖는 대신 성장에 대한 책임감·중압감도 동시에 받을 수밖에 없다.

CIC처럼 별도 조직은 아니지만, ‘센터’처럼 동영상 플랫폼, 뉴스 등을 각각 총괄하며 독립적인 권한을 갖는 장준기 엔터기술총괄, 유봉석 서비스운영총괄도 입김이 센 임원급으로 분류된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한 관계자는 “현재 네이버 임원의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 회사 초창기 대리·과장부터 시작해 현재 자리까지 올라온 ‘고인물’이라는 점이다”라면서 “대기업이 된 네이버의 현실을 냉정히 보고 뜯어 고치기 위해서는 결국 이해진 GIO가 얼마만큼 외부 새 피를 수혈하는가에 달려 있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