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면서 장바구니 물가에도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일부 글로벌 기업들은 비용 상승을 이유로 이미 제품 가격 인상을 선언했다.

지난 2월5일(현지 시각) 영국 맨체스터의 테스코 매장 내부에서 한 소비자가 통로를 따라 걷고 있다. / 로이터=연합

5일(현지 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동 전쟁이 신속히 끝나지 않을 경우, 휘발유 가격을 넘어 전반적인 물가 상승이 확산될 수 있다는 경고가 경영진과 분석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며 "에너지 비용 급등으로 기업들이 입는 타격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FT 분석에 따르면 최근 실적을 발표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기업 약 300곳 가운데 약 10%는 전쟁을 이유로 이미 가격을 인상했거나, 에너지 비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경우 추가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미국 기업들의 1분기 실적 발표에서는 '가격 조정(pricing action)'과 '비용 전가(passing on costs)'라는 표현의 언급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최고 수준으로 증가했다.

미국에서는 유나이티드항공, 콜게이트-팜올리브, 3M 등이 이익률 방어를 위해 가격 인상을 발표한 상태다. 유럽에서도 데톨 제조사인 레킷 벤키저가 비용 상승을 상쇄하기 위한 방안으로 가격 인상을 검토 중이라고 밝히는 등 글로벌 기업 전반에서 가격 인상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전 세계 석유 공급의 약 20%가 통과하는 좁은 수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운항 차질에서 비롯됐다. 이 해협은 액화천연가스(LNG), 플라스틱 수지, 알루미늄 등의 주요 운송로인데, 운항 차질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다. 실제로 국제 유가 기준인 브렌트유는 지난달 말 배럴당 126.41달러까지 치솟으며 분쟁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가 급등은 항공유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며 항공업계에 직격탄이 됐다. 미국 저비용항공사(LCC) 스피릿항공은 비용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이달 초 폐업을 결정했고, 미국 최대 저비용 항공사 사우스웨스트항공의 최고경영자 밥 조던 역시 연료 가격이 현 수준을 유지할 경우 운임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그는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큰 환경 속에서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이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공산품 가격에도 영향이 확산되고 있다. 포장재와 의류용 폴리에스터 섬유에 사용되는 플라스틱이 석유와 천연가스를 주요 원료로 하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은 "이란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급등이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영향을 줘 화학제품과 플라스틱 등 원자재 가격 상승과 제조·운송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 미국 장바구니 물가가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는 통계도 나왔다. 데이터 분석업체 닐슨IQ 집계에 따르면 월마트부터 CVS 약국까지 미국 전역 매장에서 판매되는 식료품 평균 가격은 분쟁 발발 이후 3월 28일까지 4주간 전년 동기 대비 2.9% 상승했다.

전문가들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따른 물가 상승이 이제 시작 단계라고 보고 있다. 미 금융서비스 기업 시버트 파이낸셜의 최고투자책임자(CIO) 마크 말렉은 미 경제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주유소 가격 상승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가계에 실제 타격을 주는 인플레이션은 이후 일상 제품 속에서 서서히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어 "인플레이션의 두 번째 파장은 시차를 두고 나타나며, 식료품·쓰레기봉투·처방약·항공료 등과 함께 가계 예산 전반을 점진적으로 압박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