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중동산 원유 수출이 막히자, 중질유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또 다른 중질유 주요 생산국인 러시아 원유 수출이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막힌 상황이라 중동으로 치중된 원유 수입처 다변화를 위해 캐나다에서 원유를 수입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다만, 캐나다산 원유를 수입할 경우 운송 거리 증가로 인한 비용 부담이 문제로 지적된다.

31일 정유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물론 원유 생산국인 미국마저 정제시설은 중질유 중심으로 갖춰져 있다"며 "중동산 중질유 수입이 막히면서 국제 현물 시장에서 중질유 가격이 더 뛰고 있다"고 말했다.

약 20만 배럴의 러시아산 원유를 싣고 베네수엘라 푸에르토 카베요 해안에서 쿠바로 향하는 유조선. / AFP 연합뉴스

원유는 미국석유협회(API)가 정한 API 지수(API Gravity) 기준으로 지수가 30도 이하인 원유와 지수가 30~33도인 원유 두 종류로 나뉜다. API 지수란 상온(섭씨 15.6도)에서 물(API 도수 10)과 비교한 원유의 밀도다. API 지수가 높을수록 밀도가 낮아 가벼운 원유, API 지수가 낮을수록 밀도가 높아 무거운 원유다.

API 지수가 30도 이하면 중질유(Heavy crude, 重質油), API 지수가 30~33도 사이면 중질유(Medium crude, 中質油), API 지수가 33도 이상이면 경질유(Light crude, 輕質油)로 분류된다.

API 지수가 높을수록(밀도가 낮을수록) 휘발유, 나프타 등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율이 높다. API 지수가 낮으면 아스팔트와 같은 품질이 낮은 석유제품이 많이 나온다.

원유 품질을 가르는 또 하나의 기준인 황 함량을 따져보면, 경질유는 황 함량이 낮다. 반대로 중질유는 황 함량이 높다. 황은 원유를 정제하는 장치를 부식시키고 사용하는 촉매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황 함량이 낮을수록 품질이 더 좋은 원유다.

때문에 국제 시장에 정제 비용이 저렴하며 더 좋은 석유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경질유가 중질유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국 텍사스주와 뉴멕시코주 일대에서 생산되는 서부텍사스유(WTI)는 황 함량이 0.24%로 낮고 API 지수도 38~40도 사이라 경질 저유황유다. 영국 북해 지역에서 생산되는 브렌트유는 황 함량이 0.37%로 낮고 API 지수가 38.3도라 경질 저유황유다.

반대로 아랍에미리트에서 생산되는 두바이유는 황 함량이 1.86%, API 지수는 32도라 품질이 떨어지는 중질(中質) 고유황유다. 캐나다 오일샌드(API 지수 10~12도, 초중질유·超重質油), 러시아산 원유(API 지수 31~33도, 중질유·重質油)도 광의의 중질유다.

원유의 종류와 품질. / 글로벌 공급망 인사이트 갈무리

정유사는 원유를 정제설비에서 증류해 휘발유부터 디젤, 항공유 등 석유제품으로 생산한다. 정유공장에 들어가는 원유 종류에 따라 생산할 수 있는 석유제품의 양이 달라진다. 경질유는 휘발유 생산을 많이 할 수 있고 황 함량도 낮아서 정제 비용이 적다. 반면 중질유는 휘발유 성분이 낮고 황 함량이 높아 정제 효율은 떨어진다.

중질유 벤치마크인 두바이유 가격이 경질유 벤치마크인 브렌트유보다 싼 이유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하기 하루 전인 2월 27일을 보면 두바이유는 배럴당 71.24달러로, 브렌트유(72.48달러)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됐다.

하지만 두바이유와 브렌트유의 가격은 이란 공습 이후 역전됐다. 두바이유는 이란 공습 이후인 3월 6일 브렌트유와 WTI가 배럴당 92.69달러, 90.9달러에 거래될 때 홀로 100달러를 돌파, 100.42달러에 거래됐다.

브렌트유 역시 3월 12일 이후 배럴당 100달러 이상에 거래되고 있으나, 두바이유는 배럴당 169.75달러(3월 23일)에 둘 사이의 격차가 커지면서 가격 역전이 심화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원유 정제설비가 중질유 중심으로 꾸려져 있는 영향이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중동 지역에서 주로 원유를 수입했고, 정제시설을 중동산 중질유 처리에 최적화했다. 값싼 중동산 중질유를 수입해 고부가 가치 상품을 만들어 수출하기 위해서였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단가 경쟁을 해야 하니 중질유를 써서 경제성이 나오도록 사업 구조가 만들어졌다"며 "정제시설에 중질유와 경질유를 섞어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중동산 중질유 공급이 막힌 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했다.

세계 1위 원유 생산국인 미국도 정제시설은 중질유 중심이다. 미국 정제설비 용량은 약 1800만배럴을 처리할 수 있는 규모로 이 중 70% 이상이 중질유를 사용하는 정제설비다. 초경질유인 셰일오일 생산국이지만, 중질유가 많이 필요한 구조다.

그동안 미국은 캐나다에서 주로 중질유를 수입했다. 캐나다가 하루에 생산하는 원유는 약 500만배럴로 수출하는 원유 약 400만배럴 중 300만배럴 이상이 중질유다.

신현돈 인하대 에너지자원학과 교수는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눈독을 들였던 이유가 중질유 때문이었다"며 "베네수엘라산 중질유를 미국이 수입하게 되면 캐나다산 중질유가 남는다. 중동이 막히면서 이를 공략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배송 거리 증가와 이에 따른 비용 문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캐나다가 원유 생산 지역에서 태평양 쪽으로 인프라를 건설해 아시아 쪽으로 수출은 하고 있지만, 물량이 제한적"이이라며 "호주, 아프리카에서도 중질유가 들어오지만, 결국은 비용 문제는 해결하기 힘들다. 중질유인 러시아산 도입, 중동 사태 해결에 희망을 거는 이유"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