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기차 충전기 시장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전기차 시장의 불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최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전기차 충전 인프라 업체에 주는 보조금의 지급 기준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수익성이 악화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SK시그넷 텍사스 생산공장 이미지./SK시그넷 제공

15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교통부는 지난달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대 정책인 네비(NEVI·National Electric Vehicle Infrastructure) 프로그램의 보조금 지급 기준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전기차 충전소에 들어가는 미국산 부품의 비율을 현행 55%에서 100%로 높이고, 미국 내 생산을 의무화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전기차 충전소 시장에 진출해 연방 보조금을 바탕으로 성장해 온 국내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SK그룹 계열사인 SK시그넷은 당초 네비 프로그램의 요구 조건을 고려해 텍사스주 플레이노시에 생산 공장을 지었다. 텍사스 공장에선 미국산 부품 비율 55% 이상 등 까다로운 기준에 맞춰 연 1만기 이상의 급속 충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SK시그넷은 현재 미국 전기차 충전기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 중이다. 지난해 네비 보조금이 투입된 전기차 충전소에 설치된 충전기의 약 20%가 SK시그넷 제품이었다. SK시그넷이 만든 충전기를 충전 사업자(CPO)가 구매해 미국 전역에 설치하고, 운영하는 구조다. CPO는 일렉트리파이 아메리카, 이브이고(EVgo), 프란시스 에너지 등이다.

연방 보조금이 삭감되면 신규 전기차 충전소 건설도 어려워질 전망이다. 미국 정부는 2021년 네비 프로그램을 만들며 총 50억달러(약 7조3440억원)를 보조금으로 배정했다. 건설 비용의 최대 80%를 연방 정부가 보조하고, 나머지 20%는 민간 사업자나 주 정부가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당시 조 바이든 행정부는 공사비 뿐 아니라 전력망 연결 비용, 향후 5년 간의 운영 및 유지·보수 비용까지 지급했다. 만약 연방 보조금이 삭감될 경우 전기차 충전소를 짓는 업체들의 비용 부담이 급증할 수 밖에 없다.

SK시그넷에 이어 롯데이노베이트 자회사 이브이시스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충전기 제조 공장을 지었다. 다만 점유율은 아직 미미하다. 채비는 미국 내 공장 건설을 검토했으나, 실제 진행하진 않았다.

SK시그넷과 롯데 계열사인 이브이시스 등 국내 충전기 제조사들은 미국 정부에 부품 현지화율을 100%로 높이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전달했다고 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산 부품 비율 100%는 맞출 수 있는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을 것"이라며 "정부가 연방 보조금을 없앨 목적으로 기업에 비현실적인 생산 기준을 내걸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주정부나 업계의 반발을 고려해 현지화 비율을 조절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지난해 2월 트럼프 행정부가 네비 프로그램의 기존 지침을 취소하고 이미 승인했던 주정부 집행 계획 승인도 중단하자, 주정부들이 힘을 모아 소송을 걸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