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반도체 신화를 이을 산업으로 2차전지가 꼽히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시장(중국 제외)에서 국내 2차전지 빅3 업체의 점유율은 53%로 절반을 넘었다. K배터리의 위상은 배터리셀을 넘어 소재와 장비 등 2차전지 생태계 전반으로 확장하고 있다. 2030년 전기차 생산이 5400만대로 폭증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2차전지를 놓고 ‘배터리 패권경쟁’을 펼치는 대한민국 배터리 산업의 현황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최근 2차 전지 업계와 완성차 업계가 배터리팩(배터리를 모아 놓은 묶음)을 놓고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전지 업체들은 배터리 셀에서 모듈(Module)·팩(Pack)까지 턴키 공급(일괄 수주)을 선호하지만, 완성차 업계는 차량에 최종적으로 탑재되는 배터리팩 제조는 주도권을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배터리에서 가장 작은 기본 단위는 셀이다. 셀을 일정한 개수로 모아둔 것이 모듈, 최종적으로 전기차 구조에 맞춰 각종 배터리관리시스템(BMS) 장치를 묶어 만드는 것이 배터리팩이다. 보통 전지 업체가 배터리셀과 모듈을 생산해 공급하면 완성차나 합작사(배터리+완성차)가 배터리의 온도·전압 등을 관리해주는 BMS 하드·소프트웨어, 냉각 장치 등을 추가해 배터리팩으로 만든다.

전문가들은 배터리 업계가 셀 공급만으로는 주도권을 갖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 전기차 가격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40%~50%나 된다. 전기차 주도권이 완성차가 아닌, 전지 업체로 넘어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배경 탓이다. 하지만 일본을 비롯해, 한국과 중국 등 셀을 공급할 수 있는 기업이 늘고 중국의 저가 공세와 완성차 업체들의 배터리 내재화 등으로 인해 향후 배터리 업계가 단순 부품 협력사로 격하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트위터 캡처

◇ 완성차, 셀만 받고 배터리팩은 직접 제조 선호

23일 배터리 업계와 외신 보도 등에 따르면 테슬라는 캐나다 리튬 업체 ‘시그마 리튬’의 인수를 논의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자신의 트위터에 “리튬 채굴과 정제에 직접 진출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업계에서는 테슬라가 시그마 리튬을 인수해, 리튬 생산 과정에 직접 참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도 지난 2월 리튬 광산 기업인 리튬 아메리카스에 6억5000만 달러(약 8000억 원)를 투자해 지분 10%를 인수했다. 메르세데스벤츠도 지난해 캐나다 ‘록테크리튬’과 연 평균 1만톤의 리튬을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고, BMW는 호주 ‘유러피안리튬’과 6년간 리튬 구매 계약을 맺었다. 현대차(005380)그룹도 공급망을 관리하기 위한 전담 조직 원자재협의체를 지난해 가동하기 시작했다.

완성차 업계의 잇따른 광산 투자는 전기차에 대한 주도권을 전지 업계에 내줄 수 없다는 의지가 반영됐다. 배터리에 대한 자체 기술이나 생산 없이 전기차 시대를 맞이할 경우, 회사 경영이 전지 업계에 휘둘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에 대부분의 완성차 업체는 전지 업체로부터 배터리셀만 구입하고 배터리팩으로 주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신학철(오른쪽) LG화학 부회장과 메리 바라 GM 최고경영자가 2019년 12월 배터리 합작사인 '얼티엄셀즈'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LG화학 제공

과거 2009년 북미국제오토쇼(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공개된 GM 쉐보레 볼트는 LG에너지솔루션(당시 LG화학(051910))이 배터리셀을 공급하면, GM의 미국 디트로이트 공장에서 배터리팩을 생산했다. 하지만 전기차 보급이 늘면서 배터리팩은 두 회사 간의 합작사에서 조립되고 있다. 사실상 양측 모두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상황에서 절충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전지 업계는 배터리팩 공급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373220)과 SK온, 삼성SDI(006400) 등 배터리 3사도 지속해서 BMS 등 배터리팩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소재와 공정, 핵심 기술 분야에서 2만4000개가 넘는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이 중 약 40%가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 등 시스템과 관련된 특허다.

SK온은 지난해 배터리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배터리관리칩(BMIC)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SDI는 배터리 상태를 더욱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차세대 BMS 시제품을 개발했다.

배터리 업계의 반격도 시작되고 있다. 세계 최대 전기차 배터리 생산 기업인 중국 CATL은 2025년에 셀투섀시(CTC) 기술을 상용화한다는 목표다. CTC는 배터리셀과 섀시를 직접 결합하는 배터리 패키징 기술이다. 셀투섀시 기술을 사용하면 전기자동차의 모터, CD, 온보드차저(OBC) 부품까지 모두 통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전기차의 동력 분배를 최적화하고 전력 소모를 낮추면서 주행거리를 800㎞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체의 광산 인수는 배터리를 내재화해 전지 업계의 마진을 없애겠다는 것”이라며 “전기차의 등장은 완성차 업계에 기회이자, 위기이다. 배터리 업체가 마음만 먹으면 완성차를 만들 수 있는 시대도 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

중국 CATL(닝더스다이)의 첫 해외 생산 기지인 독일 튀링겐주 에르푸르트 배터리셀 공장. /CATL

◇ 일본 방식 따라가는 K배터리… 배터리팩 공급 늘려야

완성차와 배터리 업계 간 합작사 설립의 시작은 테슬라와 일본 파나소닉이다. 파나소닉이 배터리 셀을 생산하면, 테슬라가 이 셀로 배터리 팩을 만들어 모델 S에 쓰일 배터리 완제품을 완성하는 구조다. 이에 두 회사는 배터리팩을 생산하는 ‘기가팩토리’라는 합작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테슬라와 동등한 협력 관계였던 파나소닉의 위상이 떨어지고 있다. 테슬라가 배터리 내재화를 추진하고 신형 원통형 배터리 4680은 파나소닉뿐만 아니라,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등 다른 기업도 만들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위치한 테슬라 기가팩토리./테슬라 홈페이지

문제는 국내 배터리 업체도 일본과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 배터리 3사는 완성차 업체들과 함께 전 세계에 80조원을 투입해 30여개 공장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를 막을 대안으로 배터리팩을 꼽기도 한다. 한국 배터리 업계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기술이 필요한데 배터리셀, BMS, 전력 반도체, 전력 소프트웨어 등을 일괄 수주해 공급할 수 있는 배터리팩 생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현재는 배터리 공급이 부족해 배터리 업체가 완성차 업체를 고를 수 있을 만큼 배터리 공급자가 우위인 상황”이라며 “하지만 10년~20년 후 기술이 평준화되고 배터리 가격이 저렴해지면 전기차에 대한 부가가치는 완성차 업계가 모두 가져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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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배터리 3사 해외 생산공장 현황. /그래픽=정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