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탈원전·탄소중립' 정책의 여파로 산업계가 막대한 부담을 떠안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온실가스 이산화탄소는 화력발전, 제조업 등 산업 현장에서 대량 배출된다. 탄소중립을 하려면 값싼 화력발전을 줄여야 하는데, 원전까지 없애면 전기요금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전기요금이 치솟으면 기업들은 원가 상승에 따른 가격 경쟁력 하락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뒤쳐질 수 있다.
23일 철강업계에 따르면 현대제철(004020)은 이달부터 철근 가격을 톤(t)당 2만6000원 올렸다. 일차적인 원인은 원재료인 철스크랩(고철) 가격이다. 지난 19일 고철(생철 기준) 평균 가격은 t당 71만8000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1월 42만원에서 오름세가 이어지며 71% 뛰었다. 지난 12일에는 t당 72만4000원을 기록해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고철 가격이 오르는 이유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탄소감축을 위해 쇳물을 뽑는 공정을 고로(용광로)에서 전기로로 전환하면서 원료인 고철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고로는 쇳물 1t을 생산하는 데 평균 2t의 탄소를 배출하지만, 전기로는 고로의 4분의 1 수준이다. 이런 와중에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전기요금까지 치솟았고,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전기요금 부담이 큰 시멘트 업계의 상황도 비슷하다. 시멘트 공정 원가 가운데 전기요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0%가 넘는다. 결국 전기요금이 오르는 만큼 제품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고, 수요산업들의 부담이 커진다. 재계 관계자는 "전기요금이 오르면 에너지 사용량이 많은 철강, 시멘트, 정유, 반도체업계에만 영향을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방산업으로 연쇄 효과가 발생한다"며 "최종적으로 소비자가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발전 시스템은 해외에서 에너지원을 대부분 수입해오기 때문에 국제 에너지 가격 급등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구조다. 하지만 탈원전 정책으로 전력 구입단가가 가장 저렴한 원전 발전 비중이 2016년 22%에서 2021년 16%까지 줄면서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에 더 크게 휘둘리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국제 유가와 LNG 가격이 급등하면서 한국전력(015760)이 발전사로부터 전기를 사들일 때 적용하는 가격인 전력도매가격(SMP)도 치솟고 있다. 올해 3월 평균 전력도매가격(SMP)은 킬로와트시(kWh)당 192.75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84.22원이었던 작년 3월 대비 약 130%가량 높은 수준이다. 154.42원이었던 올해 1월과 비교하면 두 달 사이 약 25% 급등했다. 전달에는 197.32원까지 올랐는데, 이는 전력거래소가 문을 연 2001년 이래 역대 최고 수준이다. 기존의 월평균 최고가인 2012년 7월(185.14원)보다도 12원 이상 높다.
정부가 전기 요금을 억누르고 있지만, 탈원전으로 한국전력의 적자가 가중되고 있는 만큼 언젠가는 전기 요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2월 열린 '에너지전환정책이 초래한 한전의 위기와 전기요금 인상 압박' 토론회에서 에너지 전문가들은 "탈원전 기조 아래에서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상향안 목표를 실현하려면 전기요금이 적정 가격(한전이 적자를 내지 않는 가격) 대비 39~44% 높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상향조정한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고려할 때 원전 비중을 늘려야 산업계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정만기 한국산업연합포럼(KIAF) 회장은 지난 21일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조정 방안'이란 주제로 진행된 제19회 산업발전포럼에서 "문재인 정부가 정한 2030년 감축 목표는 박근혜 정부 때 정한 배출량 목표치(5억3600만t)보다 1억t 더 낮춘 것으로 철강과 석유화학, 반도체 등 주요 업종의 경우 에너지 효율성이 세계 최고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간헐적 생산활동 중단과 그로 인한 일자리 축소 없이는 목표 달성이 곤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원전 활성화 시 발전 부문에서 최대 7900만t의 탄소배출 감축이 가능하다. 발전 부문 감축분을 산업이나 수송 분야 감축 목표 변경에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역시 탄소중립과 산업 발전 두마리 토끼를 잡을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원전이라고 강조했다. 심형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차기 정부가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재개하는 등 국내 원전 비중을 37.1%까지 늘린다면, 적정 가격 대비 전기요금 인상률을 기존 44%에서 22%까지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며 "탄소 배출 감축과 함께 기업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원전 비중을 늘리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