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과 한파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던 국내 중견 계절가전 업체들이 '성장의 덫'에 걸렸다.
제습기, 선풍기, 창문형 에어컨 등 이른바 '히트 상품' 하나로 시장을 호령하던 시절은 옛말이 됐다. 안으로는 삼성·LG 등 대기업의 파상공세에 치이고, 밖으로는 저가 전략을 앞세운 중국 가전 공룡들에 밀리며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9일 가전업계에 따르면 제습기 시장의 절대강자였던 위닉스(044340)의 실적 부진이 심상치 않다. 위닉스는 지난해 매출 3695억원, 영업손실 606억원을 기록했다. 2020년 영업이익 556억원을 찍으며 전성기를 누렸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3~4년 만에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위닉스는 제습기와 미니건조기 등 생활가전 부문에서 일정 수준의 매출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사업만으로는 지속 성장에 한계가 있다. 특히 저가 공세를 앞세운 중국 업체들과 LG전자 등 국내 대기업 사이에서 시장 입지가 점차 좁아지고 있다.
위닉스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2024년 파라타항공(옛 플라이강원)을 인수하며 항공업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파라타항공은 지난해 매출 152억원을 기록한 반면, 당기순손실은 무려 711억원에 달했다. 본업인 가전 사업의 부진을 메우기는 커녕, 항공사 적자가 전체 실적을 깎아먹는 '승자의 저주'에 빠진 형국이다.
선풍기 명가 신일전자(002700)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신일전자는 지난해 매출 1939억원, 영업이익 52억원을 기록했다. 2020년 매출 2000억원을 돌파한 이후 뚜렷한 성장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신일전자는 선풍기와 서큘레이터 등 기존 주력 제품에 AI 기능을 적용하고, 신규 AI 가전제품을 출시하며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2024년 말에는 AI 기반 로봇청소기 '로보웨디'를 선보였다. 하지만 중국 업체들의 가격 경쟁력과 기술 공세에 밀리며 시장 안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석유난로로 유명한 파세코(037070)는 창문형 에어컨이라는 틈새시장을 개척했지만, 최근 성장세가 꺾였다. 파세코는 지난해 매출 1679억원, 영업이익 33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2021년 매출 2271억원, 영업이익 228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한 이후 하락세를 겪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들 기업이 '단일 품목 의존형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을 위기의 원인으로 꼽는다. 계절에 따라 실적이 널뛰는 천수답 경영에서 벗어나려 신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자본력과 기술력을 앞세운 대기업이나 가성비의 중국산을 이겨낼 '한 방'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중견 가전사들이 기술을 앞세운 대기업과 가격을 앞세운 중국 기업 사이에 낀 '샌드위치' 상황"이라며 "기존 히트 제품을 대체할 새로운 성장 축을 만들지 못하면 정체 국면이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