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한파를 생각했는데 이번 경매를 보니 그 정도는 아니네요.”
미술 경매시장에서 다시 경합이 붙기 시작했다. 수억원대에 낙찰되는 작품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지난해 말 유영국·김환기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이 잇따라 유찰되고 “미술시장 좋은 시절은 다 갔다”는 회의론이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위기는 다소 바뀐 셈이다.
국내 미술계 한 관계자는 “2007년 미술시장이 역대급 호황을 구가하고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던 때가 올해부터 재연될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는데 미술 애호가(컬렉터) 층이 두터워졌다는 변수가 예상보다 큰 것 같다”고 했다.
◇ 13억 이우환·3억 유영국 등 억대 작품 낙찰 속속
지난 29일 열린 케이옥션 경매에서 이우환의 2000년작 ‘조응’(80호·4점)이 13억원에 낙찰됐고 유영국의 1980년작(40호) ‘Work’도 3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박서보의 묘법(2007년)은 1억8000만원, 장욱진의 소(1953년)는 2억1000만원에 팔렸다.
28일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서도 유영국의 1964년작 Work(100호)는 10억7000만원, 이우환의 1976년작 ‘From line(20호)’은 2억8000만원에 낙찰됐다.
이는 올해 미술시장이 정말 어려울 것이란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결과다. 작년 12월 만해도 분위기는 싸늘했다. 작년 12월 경매에서 최고 추정가 5억원짜리 유영국의 ‘Work(1991년작)’는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아 유찰됐고, 케이옥션 2월 경매에 나온 이우환의 ‘조응’ 연작 등 추정가 3억원 이상은 모두 유찰된 바 있다.
미술계에서는 미술품 수집을 오래해 온 애호가들이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큰 경쟁 없이 가져가려는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경매 며칠 전 소장자가 제 값을 받지 못할까봐 작품을 거둬들이는 현상도 크게 줄었다.
옥션사 관계자는 “미술시장이 작년보다 위축됐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입찰 결과는 좋은 편”이라면서 “좋은 작품들이 대거 나왔고 미술 애호가들의 참여는 활발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 200만원 추정가 이불 작품 3000만원에 낙찰
수억원에 이르는 작품들만 낙찰된 것은 아니다. 최저 추정가는 몇백만원 수준이었는데 껑충 올라 거래된 작품도 있었다.
3월 케이옥션 경매에서 낙찰된 이불 작품이 대표적이다. 동양 여성에 대한 차별에 저항하는 작품인 이불의 작품 ‘Alibi’는 치열한 접전 끝에 작품 최저 추정가(200만원)보다 15배 오른 3000만원에 낙찰됐다.
1964년생인 작가 이불은 권위주의적 독재시기를 살아낸 작가로 사회적 메시지를 작품에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극 중 이사라의 작품으로 나왔던 권현진 작가의 추상화도 최저 추정가(600만원) 대비 36% 오른 820만원에 낙찰됐다.
미술계에서는 최근 미술 시장에 진입한 미술 애호가들이 앞으로 성장 가능성 높은 작가 위주로 입찰에 참여하면서 나온 결과라고 해석했다. 아트테크의 불씨가 여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대어 작품으로 꼽혔던 알렉스 카츠의 대형 꽃 회화작품 ‘Yellow goldenrod’가 주인을 찾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술계의 완연한 봄날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낙찰률도 지난해보다는 여전히 떨어진다.
한 갤러리 대표는 “올해 미술시장은 처절한 수준으로 어려울 것이란 의견이 많았는데 예상했던 만큼은 아닌 것 같다”면서도 “추정가액을 훨씬 웃도는 수준에서 작품이 낙찰되던 작년 수준의 열기가 되돌아오기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