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보르도와 부르고뉴가 있고, 이탈리아에 토스카나와 피에몬테가 와인 산지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면 스페인에는 리오하(Rioja)가 있다. 리오하는 스페인 와인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산지다. 와인 재배의 역사는 고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9세기 중반까지 리오하 와인은 주로 지역 안에서 소비되는 술에 가까웠다. 장거리 운송과 보관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인을 멀리 보내려면 산화와 변질을 막을 수 있는 양조·숙성 기술, 안정적인 유통망, 외부 시장과의 연결이 필요했다. 리오하가 본격적으로 세계적 산지의 기반을 다진 계기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보르도와의 교류였다.
1850년대 프랑스 포도밭에는 백분병이 돌았고, 1869년 무렵에는 보르도 인근에서 필록세라 피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랑스 와인의 공급이 흔들리자 보르도 상인과 양조가들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품질 잠재력이 있는 산지를 찾기 시작했다. 이때 주목받은 곳이 스페인 북부의 리오하였다. 보르도식 양조 기술과 상업적 유통 방식이 리오하에 들어왔고, 포도 선별과 줄기 제거, 오크통 숙성, 병 숙성 같은 방식이 확산됐다.
철도도 리오하의 성장을 앞당겼다. 19세기 후반 하로(Haro)를 중심으로 철도망이 연결되면서 리오하 와인은 스페인 북부 항구와 프랑스 시장으로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와인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리오하에는 지금도 이름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와이너리들이 자리 잡았다. 프랑스식 225리터 바리크 숙성, 토착 품종인 템프라니요 중심의 블렌딩, 병 숙성을 거친 부드러운 질감은 이 시기 이후 리오하 와인을 대표하는 방식이 됐다.
스페인에는 원산지 등급 분류 중 가장 높은 등급인 DOCa 등급을 보유한 지역이 두 곳뿐인데 그중 한 곳이 리오하다. 리오하 DOCa 관리위원회가 지난해 발행한 '2024 연례 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리오하에는 등록된 포도밭 6만6638헥타르, 와이너리 751곳, 포도 재배자 1만3078명을 보유하고 있다. 2024년 판매량은 3억2846만병, 수출국은 135개국에 달했다. 전체 판매량 가운데 스페인 밖에서 판매된 비중은 41.2%였다.
리오하의 긴 역사 속에서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Marqués de Cáceres)는 비교적 젊은 와이너리에 속한다. 설립 연도는 1970년이다. 강조한 현대적 리오하 스타일을 제시한 생산자로 평가된다.
와이너리를 세운 인물은 엔리케 포르네르(Enrique Forner)다. 포르네르 가문은 1920년부터 스페인 발렌시아 지역에서 와인 생산과 판매, 수출업을 이어온 집안이었다.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스로 건너간 엔리케 포르네르는 1952년 론과 루아르에서 와이너리를 세웠고, 1968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는 보르도 양조학자 에밀 페이노(Émile Peynaud)의 영향을 받아 포도밭 관리와 포도 선별, 저온 발효, 프렌치 오크 사용 등을 리오하에 접목했다. 당시 리오하 와인의 일부가 오래된 오크 숙성에서 오는 산화적 풍미와 나무 향에 기대고 있었다면, 엔리케 포르네르는 템프라니요의 과실감과 생동감을 살리면서도 오크와 병 숙성을 통해 구조감을 부여하는 방식을 택했다.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가 전통적인 리오하의 틀 안에서 보다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감각을 보여준 생산자로 평가되는 이유다.
현재 와이너리는 엔리케 포르네르의 딸 크리스티나 포르네르(Cristina Forner)가 이끌고 있다.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 크리안자는 이 와이너리의 스타일을 가장 일상적이고 명확하게 보여준다. 크리안자는 리오하에서 법적으로 관리되는 숙성 등급이다. 크리안자 등급을 받으려면 레드 와인은 최소 2년 숙성을 거쳐야 하며, 이 가운데 최소 1년은 225리터 오크통에서 숙성해야 한다.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 크리안자는 주로 점토 석회질 토양에서 자란 포도를 사용한다. 모두 손으로 수확한 뒤 줄기를 제거한다. 온도 조절이 가능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알코올 발효를 진행한다. 껍질과 함께 최대 20일간 침용해 색과 향, 입안의 밀도를 끌어낸다. 젖산 발효는 포도밭과 구획의 특성에 따라 새 오크통과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나눠 진행한다.
숙성은 프렌치 오크통 60%, 아메리칸 오크통 40% 비율로 1년 동안 이뤄진다. 이후 와이너리에서 최소 1년간 병 숙성을 거친 뒤 출시된다.
잔에 따르면 중간 정도 농도의 루비색을 띤다. 코에서는 발사믹 뉘앙스와 잘 익은 검은 과실 향이 느껴지고, 그 뒤로 부드러운 스파이스와 섬세한 오크 향, 은은한 감초 향이 이어진다. 입안에서는 풍성한 볼륨감과 감싸는 듯한 질감이 돋보인다. 마무리에는 멘톨과 발사믹 계열의 산뜻한 인상이 남는다.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 크리안자는 미국 와인 전문지 '와인 & 스피리츠(Wine & Spirits)'가 조사한 미국 레스토랑 내 스페인 와인 판매 순위에서 지난 6년 동안 5차례 1위에 올랐다. '2026 대한민국 주류대상' 구대륙 레드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 수입사는 롯데칠성음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