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이 밀려드는 넓은 들녘. 남루한 복장을 한 농부 부부가 고개 숙여 기도한다. 발치에는 반 쯤 빈 바구니가 놓였다.
그 주위로 캐다 만 감자 몇 개가 여기저기 널부러졌다. 부부는 잠시 일손을 놓고 저녁 기도 종소리에 맞춰 두 손을 모았다. 고달픈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소박한 수확을 안겨준 하늘에 감사를 드리는 모습이다.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명화 ‘만종(晩鍾)’은 화려하지 않지만 평화로운 전원생활 풍경 그 자체다. 지극히 평화롭게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다가, 귀를 그림 가까이 기울이면 멀리 예배당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만종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 그림 원래 제목은 ‘삼종기도(L’ Angelus)’다. 삼종기도는 성당에서 하루 세 번 종을 쳐 알려주는 시간에 하는 기도다. 밀레는 이 그림에 직접 ‘저녁 기도’라는 부제를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 이 부제가 성당 종소리와 맞물리면서 이 그림은 만종, 즉 저녁 종소리로 알려졌다. 국내를 대표하는 화백 박수근은 1926년 12살 때 이 작품을 보고 장차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박수근미술관이 소장한 박 화백 스크랩북에는 만종 외에도 ‘이삭 줍는 사람들’, ‘어머니와 아들’ 같은 대표작이 들어있다. 박 화백은 “하루 일과를 마친 농촌부부가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경외감과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마음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대다수 평론가 생각은 박수근 화백과 달랐다.
이 작품이 탄생한 1860년 당시 밀레는 물감을 살 돈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상(畵像) 아르투르 스테반스는 1000프랑을 지원해 줬다. 1800년대 중반 1프랑은 지금 2유로(약 2800원) 정도 가치다.
280만원 정도였던 이 그림은 뒤늦게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가 1860년 1000프랑에 팔았던 만종은, 불과 30년 뒤 1890년 작품가가 80만프랑에 이르렀다. 800배나 값이 올랐다 한들 이미 밀레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샤토 앙젤뤼스는 밀레가 그린 그림과 이름이 같은 와이너리다. 와이너리 입구에 큰 종탑이 있어 삼종기도를 뜻하는 ‘앙젤뤼스’ 이름이 붙었다. 이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와인 겉면에도 큰 종 그림이 들어간다.
생테밀리옹 지역에서는 뛰어난 와인을 만드는 생산자들에게 그랑 크뤼 등급을 부여한다. 샤토 앙젤뤼스는 수십 년 전부터 이 지역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와이너리 가운데 한 곳으로 꼽혔다.
1954년 이 지역에서 첫 와이너리 등급 심사가 열렸을 때 샤토 안젤루스는 ‘그랑 크뤼’ 등급을 차지했다. 2012년 심사에서는 생테밀리옹 700여개 와이너리 가운데 오직 두 곳뿐인 ‘프리미에 그랑 크뤼 클라세A’로 뽑혔다.
그러나 샤토 앙젤뤼스는 세간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았다. 가장 최근 있었던 2022년 등급 평가에서 스스로 프리미에 그랑 크뤼 클라세A를 반납했다. 고급 와인을 평가하는 새 기준이 더 이상 가치를 공인받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샤토 앙젤뤼스는 여전히 글로벌 와인시장에서 500달러(약 70만원)를 웃도는 고가에 팔린다. 등급 평가에서 벗어났어도, 와인 애호가들은 샤토 앙젤뤼스를 추앙한다. 살아 생전 박한 평가를 받았던 밀레 그림과 다르게 샤토 앙젤뤼스 와인은 평론가들에게도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2018년 샤토 앙젤뤼스는 ‘와인 대통령’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을 받았다.
이 와인은 메를로라는 품종 포도를 중심으로 만든다. 메를로는 유명한 레드 와인 품종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포도알이 크고 보름 정도 빨리 익는다. 더 넓은 포도 껍질 면적에 비례해 다소 부드럽고 과즙이 풍부하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샤토 앙젤뤼스는 메를로 중심으로 카베르네 프랑이라는 포도 품종을 거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높게 섞는다. 이 품종은 동양적인 향신료 풍미를 와인에 스며들게 한다. 길고 미묘한 여운을 강조하기에도 좋다. 수입사는 국순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