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차밭에 있는 오설록 티팩토리. 건물 외부에서 전 생산 공정을 관람할 수 있도록 큰 창을 냈다. 빨간 벽돌은 제주 화산송이로 만든 것이다. /김은영 기자

지난 9월 30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차밭. 광활한 차밭 옆으로 붉은 벽돌로 만든 나지막한 건물이 서 있다. 얼핏 보면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지만, 이곳은 오설록농장이 지난해 조성한 티팩토리다.

이름처럼 생산 설비를 갖췄지만, 시끄러운 기계음 하나 없이 자연과 조화를 이뤘다. 건물 가까이 가자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향기가 났다. 공장에서 가공하는 차(茶)의 향이 건물 밖으로 전달되도록 시향 장치를 만들어 놓은 덕분이다.

이민석 오설록농장 연구소장은 “지금 배향을 첨가한 ‘달빛걷기’를 만드는 중인데 그 향이 건물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라며 “외부에서도 생산 공정을 볼 수 있도록 커다란 관람 창을 두고 향을 맡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라고 말했다.

오설록 티팩토리는 지난해 9월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차 사업을 위해 생산법인 (주)오설록농장과 판매법인 (주)오설록을 운영 중인데, 티팩토리 준공과 함께 흩어져 있던 오설록농장 본사와 연구소, 생산시설을 한데 모았다. 티팩토리 건립을 위해 쓴 금액만 700억원에 달한다.

이 소장은 “기획부터 건물을 짓기까지 8년가량이 걸렸다”면서 “원료 재배부터 최종 제품까지 한꺼번에 나오는 차 회사는 세계적으로 오설록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정서희

◇45년 전 서귀포 황무지 일궈 100만 평 차밭 조성

오설록이 제주를 차 사업의 본거지로 삼은 건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고(故) 서성환 선대회장은 한국의 차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 한라산 남서쪽 도순 지역의 돌밭을 녹차밭으로 개간했다. 이 돌송이차밭을 시작으로 서광차밭, 한남차밭 등 서귀포 지역 3곳에 차밭 100만 평(330만5785㎡)의 다원을 일궜다.

식품기업이라면 원료를 사다 제품을 만들었을 테지만, 오설록은 농사부터 시작했다. 이는 아모레퍼시픽의 창업 철학과 연관이 있다. 서 선대회장의 모친 윤독정 여사는 직접 짠 동백기름으로 머릿기름을 팔다가 화장품 사업을 확대했다. 곁에서 사업을 배운 서 선대회장 역시 ‘원물’의 중요성을 인지, 차 농사부터 뛰어들었다.

제주 녹차밭을 가꾸는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선대회장. /오설록 제공

직접 차밭을 일군 스토리는 럭셔리 티 브랜드 오설록을 만드는 기반이 됐다. 1980년 설록차를 출시해 차 대중화를 이끈 회사는 2015년 녹차 브랜드를 오설록으로 통일하고, 2019년에는 사업부를 독립 법인으로 분사했다. 매출의 80%를 차지하던 설록차 티백 사업도 중단했다.

대신 고급 제품을 강화했다. 대표적인 게 손으로 골라 딴 어린 찻잎을 장인이 덖어 만든 수제 차 ‘일로향’이다. 1년에 1000개만 한정 생산하며, 가격은 60g에 17만원이다.

20개 넘게 운영하던 오설록 카페도 제주 티뮤지엄, 티하우스 북촌점과 한남점, 현대미술관점 등 체험형 매장 8곳으로 줄였다. 2001년 서광차밭에 개관한 티뮤지엄의 경우 연간 18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이 중 30%는 외국인 관광객이다.

이런 노력으로 분사 당시 500억원대던 오설록의 연 매출은 지난해 839억원으로 뛰었다. 분사 전까지 적자를 냈던 영업이익도 이듬해 흑자로 돌아서 지난해 55억원을 기록했다. 화장품 사업만 하던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된 셈이다.

그래픽=정서희

◇’메이드 인 제주’로 글로벌 차 시장 본격 공략

제주에 구현한 오설록 티팩토리도 고급화 전략의 일환이다. 찻잎을 수확하자마자 가공하고 포장까지 하는 일원화된 생산 시스템을 통해 최고급 차 생산지로서 제주와 오설록 브랜드를 세계에 알린다는 포부다. 지난달엔 판매법인인 (주)오설록의 본사도 제주로 이전해 ‘제주’ 태생의 브랜드 정체성을 굳혔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도 한 달에 한번은 제주를 찾아 차 사업장을 점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설록 티팩토리는 2만3000m²(7100평)의 대지면적에 건축면적 7200m²(2200평) 규모의 공간으로, 연간 646톤(t)의 제품을 제조하고, 8600만 개 제품을 출하할 수 있다. 조민석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은 주변의 자연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고안됐다. 외관의 붉은 벽돌은 제주의 화산송이를 넣어 만들었다.

이 소장은 “세계 10대 건강식품하면 꼭 차가 들어간다. 그런만큼 설계 단계부터 다양한 글로벌 식품 안전 기준을 반영했다”면서 “티팩토리는 안전하고 근대화된 차 식품 공장”이라고 말했다.

9월 30일 이민석 오설록농장 연구소장이 조선비즈에 오설록 티팩토리를 소개하고 있다. /오설록 제공

티팩토리를 통해 생산 물량이 기존보다 1.5배 늘어난 만큼 글로벌 진출도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오설록은 2020년 3월 미국 최대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아마존에서 판매를 시작한 이래 매년 100%가 넘는 성장률을 보인다. 사측은 럭셔리 티 브랜드 이미지에 중점을 두고 현지 주요 유통사에 입점할 방침이다.

이날 티팩토리에서는 올 하반기 출시를 앞둔 블렌티드 티인 ‘무화과쇼콜라’와 ‘마롱글라세’를 시음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차 모두 디저트와 곁들이기 좋은 풍미를 지녔다. 녹차에 다양한 맛과 향을 첨가한 블렌디드 티는 최근 젊은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오설록 전체 매출의 절반가량이 블렌디드 티에서 나온다.

티팩토리는 이르면 올 연말 식음(F&B) 및 판매 업장을 개장하고 공장 투어를 개시해 브랜드 체험 공간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이 소장은 “인프라가 일원화된 만큼 브랜드가 가지는 가치를 고객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오설록 티팩토리 관람창을 통해 본 포장 생산 공정. /김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