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업계에도 셀럽(유명인)은 중요하다.
20여 년 전에는 속칭 ‘이건희 와인’이 등장할 때마다 파장을 일으켰다. 국내 와인 시장이 지금처럼 무르익지 않았을 시기다.
2004년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그해 추석 선물로 주요 계열사 고위 임원들에게 이탈리아산(産) 와인 티냐넬로(Tignanello)를 돌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직전 해였던 2003년 추석 때는 이 회장이 계열사 사장단과 임원들에게 사시카이아(Sassicaia)를 선물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사시카이아와 티냐넬로는 이탈리아 와인을 고급 와인 반열에 오르게 한 슈퍼투스칸의 효시(嚆矢)다. 슈퍼투스칸은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에서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에 가까운 양조법으로 만든 와인을 일컫는다.
1980년대 무렵 이 지역 일부 생산자들은 수백 년간 이어졌던 포도 재배 관습을 갈아엎었다. 정부가 정한 품종 대신 본인들이 키우고 싶은 품종으로 밭을 채웠다.
국내에서 슈퍼투스칸 와인들은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회의 발언과 맞물려 경영자들에게 혁신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이들 와인은 판매고가 극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 시기를 노려 ‘나도 슈퍼투스칸’을 자청하는 유사 와인들이 대거 들어왔다. 소비자들이 느끼는 피로감도 커졌다. 슈퍼투스칸하면 떠올랐던 도전, 열정, 혁신 같은 희망적인 단어마저 빛이 바랬다.
풀리아(Puglia)는 이런 아쉬움을 채워줄 수 있는 이탈리아 와인 산지다. 이 지역은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지도에서 구두 굽에 해당하는 남부에 속한다. 전 세계 와인 생산량 1위를 차지하는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많은 와인을 만들던 지역이다.
여기서 만드는 와인은 2000년대까지 이탈리아 전체 생산량 가운데 20%를 차지했다. 슈퍼투스칸으로 명성을 얻던 이전 토스카나 지방에서도 현재 풀리아만큼 많은 와인이 쏟아져 나왔다.
다만 비슷한 평판 역시 따라붙었다. ‘그저 저렴하게 마실 벌크와인을 만드는 지역’이라는 오명(汚名)이다. 벌크와인은 병에 담지 않은 채 파는 와인을 말한다. 오래전 우리나라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퍼서 팔던 방식과 비슷하다.
풀리아 지역 일부 생산자들은 벌크와인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슈퍼투스칸처럼 도전적인 와인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제 곧 슈퍼풀리안 시대가 열린다는 믿음으로 고급 와인 만들기에 몰두했다.
풀리아 와인 고급화를 이끄는 두 품종은 프리미티보(Primitivo)와 네그로아마로(Negroamaro)다. 프리미티보는 미국에서 진판델(Zinfandel)이라 부르는 품종이다. 미국산 진판델 와인은 대부분 적당한 무게감에 마시기 편한 편이다.
반면 풀리아에서 프리미티보로 만드는 와인은 묵직하다. 무화과나 블루베리 같은 검은 과일 향이 진하게 난다. 풀리아산 네그로아마로 와인은 질감이 부드럽고 농익은 자두와 라즈베리향, 계피에서 나는 매콤함이 매력적이다.
노떼 로사는 풀리아를 대표하는 이 두 품종을 과감하게 절반씩 섞어 바시아라는 와인을 만들었다. 이 지역에서도 이 두 품종을 섞어서 와인을 만드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 토착 품종은 기르기 어렵고 수확량이 적다. 대다수 생산자가 박리다매라도 수익을 보장하는 저급 품종을 선호한다.
바시아는 슈퍼풀리안 시대가 온다면 그 포문을 열 만큼 상징적인 와인으로 꼽힌다. 이 와인은 풍부한 과일 향, 부드러운 질감, 묵직한 무게감처럼 우리나라 소비자가 좋아하는 조건을 두루 갖췄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 와인은 2024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구대륙 레드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젠니혼주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