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라면값 인하’ 발언을 하고 농림축산식품부가 제분 회사들을 잇달아 불러들여 압박을 가하자 결국 농심(004370)과 삼양식품(003230)이 27일 백기를 들었다. 이날 농심은 대표 제품인 신라면과 새우깡의 가격 인하를 발표했고, 뒤이어 삼양식품도 삼양라면 등 제품 가격을 내리겠다고 했다.
농심과 삼양식품이 라면 가격을 내린 건 이명박 정부 때인 지난 2010년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다. 밀가루 가격이 내려간 것을 근거로 한 정부의 가격 인하 압박이 거세지자 라면·과자 시장 점유율 1위 회사인 농심이 선제적으로 움직였고 삼양식품이 뒤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농심은 7월 1일부로 신라면과 새우깡의 출고가를 각각 4.5%, 6.9%씩 인하한다고 밝혔다. 소매점 기준 1000원에 판매되는 신라면 한 봉지의 가격은 50원, 1500원인 새우깡은 100원 각각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농심은 “국내 제분 회사로부터 공급받는 소맥분의 가격은 오는 7월부터 5.0% 인하될 예정으로, 농심이 얻게 되는 비용 절감액은 연간 약 80억원”이라며 “이번 가격 인하로 연간 200억원 이상의 혜택이 소비자에게 돌아갈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농심 관계자는 “가격 인하 대상인 신라면(봉지면)과 새우깡은 국내에서 연간 36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며 “이번 가격 인하로 경영에 부담은 있지만 국민생활과 밀접한 제품을 대상으로 했다”고 설명했다.
삼양식품도 7월 1일부로 삼양라면과 짜짜로니, 맛있는라면, 열무비빔면 등 12개 제품 가격을 평균 4.7% 인하한다고 밝혔다. 삼양라면 5입 제품은 할인점 판매가 기준 3840원에서 3680원으로, 짜짜로니는 4입 제품 기준 3600원에서 3430원으로, 열무비빔면은 4입 제품 기준 3400원에서 2880원으로 내린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가격 인하 효과를 체감할 수 있도록 60년 전통의 국민 라면인 삼양라면 등 오랜 기간 사랑받아온 제품을 포함한 10여 종의 다양한 품목을 선정했다”고 했다.
◇ 추경호 공개 저격 후 농식품부 제분업체 압박 효과
농심의 이번 결정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정부의 가격 인상 자제 당부가 실제 가격 인하로 이어진 첫 사례다. 정부의 가격 인하 압박 수위가 높아지면서 식품회사들의 부담이 커진 것으로 풀이된다.
추 부총리는 지난 18일 라면 가격을 언급하며 “기업들이 밀 가격을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농식품부는 지난 26일 제분업체들과의 간담회를 열고 밀가루 가격에 대해 논했다.
당시 간담회의 골자는 국제 밀 가격이 내렸는데 국내 제분업계의 밀 납품 가격도 내려가야 하지 않겠냐는 취지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 밀 선물가격은 지난해 11월부터 이달까지 300달러를 밑돌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밀 선물가격은 지난해 5월 1톤당 419달러까지 올랐지만, 이후 하락해 이달엔 1t당 243달러로, 지난해 5월 대비 58% 떨어졌다. 이에 제분업계는 다음 달 밀가루 출하 가격 인하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밀가루는 식품회사들이 과자·라면 가격을 올리면서 사유로 꼽았던 대표적인 원재료기 때문에, 밀가루 납품 가격이 내려가면 식품회사들의 인상 명분이 사라진다. 이를 염두에 둔 정부가 제분업체들까지 불러들여 압박 수위를 높인 것으로 풀이된다.
업계 1위 농심이 CJ제일제당으로부터 공급받는 밀가루값 인하에 따라 제품 가격 인하를 발표했고, 뒤이어 삼양식품도 제품 가격을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오뚜기도 7월 중으로 진라면을 포함한 주요 라면 제품 가격을 내린다는 방침이다.
오뚜기 관계자는 “가격 인하를 검토할 예정이지만, 인하율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삼양식품 관계자도 “인하 대상 품목과 인하 폭을 조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다음은 빵·과자 차례?… 제과·제빵社들 “밀가루값 인하 효과 크지 않아”
이번 농심의 가격 인하가 밀가루를 원재료로 하는 다른 식품기업으로 퍼져나갈지 주목된다. 앞서 지난 2010년, 롯데제과와 크라운해태 등 식품업체들은 원룟값 하락에 따라 제품 가격을 내리기도 했다.
다만 제과·제빵 업계는 우선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밀가루가 주요 원재료 중 하나이긴 하지만, 라면에 비해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 밀가루값 인하가 생산원가에 반영률이 낮다는 이유에서다.
농심과 마찬가지로 CJ제일제당에서 밀가루를 공급받는다는 한 제과업체 관계자는 “제과업체는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는 껌이나 초콜릿부터 감자나 옥수수 등을 활용한 제품도 많다”면서 “밀가루가 라면에 비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 당장은 가격 조정을 검토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다른 제과업체 관계자도 “제과업체들 대부분 영업이익이 높은 상황이 아니다”라며 “밀가루 가격 인하가 생산 원가에 미치는 비중도 작아 제분 업계에서 밀가루 공급가를 낮춰준대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제빵업계 역시 비슷한 입장이다. 한 제빵업계 관계자는 “제과업체에 비해 밀가루 비중이야 높겠지만, 가공비·인건비·수도 전기요금 등이 올라 원가 부담은 높은 상황”이라면서 “빵 제품에 원재료 한 가지만 들어가는 게 아니지 않나. 우선은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지난해 정부는 8차례 이상 공개적으로 물가 안정을 위한 이들의 협조를 요청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주요 제과·제빵 업체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과 코로나19로 밀 수입 단가가 오르기 시작한 2020년 9월 이후 지속해서 가격을 올렸다.
SPC그룹이 운영하는 파리바게뜨는 해당 기간 가격을 세 차례 올렸다. 지난 2021년 2월 95개 품목에 대해 평균 5.6% 인상을 시작으로, 지난해 1월 66개 품목의 판매가를 6.7% 올렸다. 지난 2월에도 95개 품목에 대해 평균 6.6%씩 가격을 올렸다.
뚜레쥬르도 이 기간 두 차례 가격을 올렸다. 뚜레쥬르는 2021년 1월 90개 품목의 판매가격을 9% 인상한 뒤 지난해 8월 80개 품목을 9.5% 인상했다.
제과 업계도 팬데믹 시기에 원재료 가격 상승을 이유로 들며 제품 가격을 두 자릿수로 올렸다. 롯데제과(현 롯데웰푸드(280360))는 2021년 9월 과자류 11개 품목 가격을 평균 12.2% 올렸다. 지난해 4월엔 아이스크림과 과자 제품 10여종의 가격을 12% 올렸다.
오리온(271560) 역시 지난해 9월 초코파이, 꼬북칩 등 16종 제품 판매 가격을 15.8% 인상했다. 해태제과도 2021년 6월 제품 5종 판매 가격을 10.8% 올렸고, 지난해 4월에도 8개 제품 판매가격을 12.9% 인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