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스코틀랜드 위스키 ‘맥캘란 파인 앤 레어 1926′이 5만4000달러(약 7000만원)에 낙찰되자 관객들은 탄성을 내질렀다.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이 위스키는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190만달러(약 24억원)에 낙찰됐다.2022년 12월 현재 소더비는 이 위스키 입찰 시작가를 35만파운드(약 5억6000만원)으로 설정했다. 보통 주류 낙찰가는 입찰가의 5~10배에 달한다.
‘고급 위스키, 지금이 제일 싸다.’
한때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고급 위스키가 대중적인 대체 투자 자산으로 주목 받고 있다. 위스키는 와인처럼 소비와 투자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투자 대상이다. 그러나 와인보다 도수가 높아 상할 염려가 덜하고,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경매 시장에서 그림이나 조각, 골동품, 시계, 귀금속은 마시거나 먹을 수 없지만 위스키는 음미할 수 있어 더 매력적인 재화로 통한다.
스코틀랜드 투자은행 노블앤코(Noble and co)가 데이터 조사기업 브레인웨이브와 지난 10년간 위스키 경매에서 이뤄진 거래 약 58만건을 추적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파인 앤 레어(Fine and Rare)’ 등급 싱글몰트 위스키 거래 건수는 지난해보다 23% 늘었다. 가격 역시 20% 이상 상승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글로벌 경매 시장에서 위스키는 주류 가운데 와인이나 코냑보다 위상이 높지 않았다. 그저 구색 맞추기 식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다. 1970년대부터 글로벌 주류 경매 시장을 이끌어 온 소더비에 따르면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경매대에 오를 주력 주류는 와인이었다. 위스키가 차지하는 비중은 1% 미만에 그쳤다.
그러나 2017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중국산 고급 주류 마오타이와 희귀 스카치 위스키를 찾는 수요가 늘면서 최근 위스키 비중은 7%를 넘어섰다. 글로벌 주류 시장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국, 일본, 대만 위스키 수집가들이 고가 희귀 위스키에 선뜻 지갑을 열기 시작한 덕분이다.
스위스 프라이빗뱅킹(PB) 줄리어스 베어 그룹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초부유층이 가장 많이 구매한 품목은 위스키로 전년 대비 증가율이 27.4%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자동차와 와인 구매는 각각 9.5%, 26.1% 줄었다.
여기에 최근 잇따른 금리 인상으로 금융자산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변동성이 덜한 대체 자산을 선호하는 젊은 투자자까지 위스키 경매 시장에 몰려들었다. 노블앤코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위스키 경매 시장을 주도한 거래는 대부분 100~1000파운드(약 16만~160만원) 사이에서 이뤄졌다. 이전처럼 ‘감히 넘볼 수 없는’ 가격대 위스키가 아니라, ‘여차하면 마실 수도 있는’ 가격대 위스키가 인기몰이를 한 셈이다.
100~1000파운드 사이 위스키에 대한 경매 총 금액은 글로벌 금융 시장이 출렁이기 시작한 올해 3분기 사이 40%가 뛰었다. 같은 시기 이 가격대 위스키 판매량도 30%가 증가했다.
위스키 보고서 총괄 책임자 던컨 맥파지언은 “금리인상이나 경기 둔화에 따라 위스키 수요가 줄고 있다는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며 “젊은 투자자들과 위스키를 선물(gift)하려는 구매자들 중심으로 시장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올해 3분기 위스키 경매 단일 건 기준으로 역대 최고가 기록이 새로 쓰여졌다. 지난 10월 서울 강남에서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서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 발베니가 내놓은 한정판 세트 ‘DCS컴펜디움’ 25병이 5억원에 낙찰됐다. 컴펜디움은 발베니의 몰트 마스터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2016년부터 5년 동안 매년 1개씩 선보인 한정판 위스키 총 5병을 한 군데 모아 선보인 희귀 세트다.
투자업계에서는 특정 연산에 특별한 방식으로 제조한 위스키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물량이 수십~수백병으로 한정적이기 때문에 이를 오랫동안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투자 수익을 누릴 수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영국 컨설팅 기업 나이트프랭크가 발표한 지난해 4분기 ‘럭셔리 인베스트먼트 인덱스’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최고 수익률을 기록한 대체 투자 상품은 희귀 위스키(428%)였다. 자동차(164%), 와인(137%), 시계(108%), 가방(78%) 같은 전통적인 사치품을 크게 웃돌았다.
위스키 투자 컨설팅사 레어 위스키 101 창업자 앤디 심슨은 경기 침체 우려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위스키 투자를 시작하려는 초보자들에게 3가지 접근법을 제시했다. 첫번째는 좋아하는 위스키 브랜드가 내놓은 모든 제품을 두루 수집하는 것, 두번째는 좋아하지 않더라도 투자자들이 선호하는 모든 위스키 브랜드 제품을 한 병 씩 전부 사보는 것이다. 마지막 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증류소를 공략하는 것’이다. 위스키는 한 번 인지도를 얻기 시작하면 가격이 계속 오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신 섣불리 수천만원대 고가 위스키에 손을 대지는 말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주식·채권 등 전통 자산 대비 정보가 제한적인 데다 가격 예측성이 떨어져 투자 위험이 작지 않다는 것이다.
김지현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은 “위스키는 가치 산정을 정확하게 하기 어렵고, 이 때문에 사고가 나더라도 피해금액을 산정할 전문가나 기술이 외국에 비해 부족하다”며 “위스키 재테크 열풍이 불고 있지만, 국내 시장 규모는 아직 작기 때문에 아직 위스키 같은 물품에 대한 보험 상품이 부족하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