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환율이 1310원이 넘어서 백화점에서 사는 게 700원 더 싸요.”
지난 20일 오후 5시 30분쯤 서울 송파구의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 화장품 매장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은 인기 제품인 ‘립글로우’를 보던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환율이 계속되며 면세점 가격과 백화점 가격의 차이가 근소할 뿐만 아니라 되레 더 저렴한 경우가 생긴 것이다.
이날 딸과 함께 면세점을 찾았다는 김명숙(53)씨는 “면세점은 좀 쌀까 해서 와봤는데 딸이 검색해보니 인터넷으로 사는 게 훨씬 더 싸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면세점을 둘러보던 20대 직장인 정혜민씨는 “오는 토요일 태국 여행을 앞두고 면세점에 들렀는데 환율이 높아서 그런지 사람이 정말 없다”고 말했다.
고환율·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유행으로 인해 면세점을 찾는 해외여행객이 줄자 면세점은 재고 사입량을 줄이며 허리띠를 다시 졸라매고 있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이달 14일 1320원대를 넘어 약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미 재무장관이 만나 필요시 미국 재무부가 외화 유동성 공급 장치를 실행할 수 있다는 합의 내용을 발표한 다음날이었던 20일도 여전히 1310원대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코로나19 감염자 수도 이달 18일부터 3일 연속 7만명을 넘으며 재유행 조짐이 보이자 일단 면세점들은 재고 구매량을 줄이는 방식을 택했다.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해 이달 기준 롯데면세점은 구매량을 35~40%, 신세계면세점은 구매량을 37%가량 줄였다고 밝혔다. 면세 물품 구매량을 축소하고 재고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다.
구매량 추이를 공개하지 않은 한 면세점 관계자는 “매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구매량을 밝히긴 어렵지만,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면세점이 주문량을 줄이며 매장에서 구매할 수 있는 제품이 줄자 “면세점에서 살 게 없다”는 하소연도 나왔다.
어머니와 함께 해외여행 전 면세점을 찾았다는 20대 김모씨는 “샤넬 쿠션을 사려고 하는데 온라인도, 오프라인도 모두 품절이라 헛걸음했다”고 말했다.
이 면세점의 명품 뷰티 브랜드 A매장은 쿠션 3가지 종류 중 2가지 종류가 모두 품절된 상황이고, 립스틱과 틴트 등도 인기 색상은 품절됐다.
이 매장 직원은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주문 수를 줄여 품절된 상품이 많다”며 “인천공항이나 제주공항점이 그나마 나은데 그곳도 인기 제품은 빨리 품절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명품 뷰티 브랜드 B매장은 인기 제품인 립글로우 4종 중 2종만 재고가 소량 남은 상태였다. 매장 직원은 “한 달에 한 번씩 재고가 들어오는데 적으면 10개, 많으면 60~70개 정도라 입고 즉시 품절된다”고 설명했다.
내국인 면세 한도가 600달러까지 정해진 탓에 명품과 같은 고가의 제품의 경우 면세점가는 저렴해도 관세가 절반가량 붙기도 했다.
21일 찾은 서울 중구 회현동 신세계면세점 명품 매장도 손님이 보이지 않는 썰렁한 모습이었다. 한 명품 매장에 들어가서 대표 백(가방) 스몰 사이즈의 가격을 묻자 “환율이 높아 백화점가와 큰 차이는 없는데 관세청 예상 세액을 계산하면 300만원 넘게 추가된다”고 말했다.
면세점가는 710만원, 백화점가는 750만원인 이 가방은 세액을 합산하면 면세점가 1010만원, 백화점가 750만원으로 가격이 역전됐다.
이날 기준 600달러가 넘는 제품에 대해 세금이 만만치 않게 붙는데다 환율도 올라 내국인의 발길이 뜸한 것이다.
이처럼 면세 물품 구매가 내국인 고객에게 불리하다는 면세업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부는 면세한도를 상향하기로 했다. 기존 600달러였던 면세한도를 800달러 정도로 높이기로 한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이날 오후 서울 은행회관에서 휴대품 면세 한도를 기본 600달러에서 800달러로 상향한 ‘2022년 세제개편안’을 심의·의결했다.
면세업계는 환율로 인한 면세점 가격 이점이 줄어든 대신 내국인 고객 혜택을 늘리는 방향으로 마케팅을 펼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