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롯데마트 제타플렉스 '테이스팅탭' 앞에서 와인잔을 들고 있는 보틀벙커팀의 유승연MD, 김민주MD, 정슬기MD. /이신혜 기자

백화점도, 고급 와인샵도 아닌 ‘마트’에서 실체도 없이 시작한 보틀벙커는 롯데마트 제타플렉스(리뉴얼된 잠실점의 이름)에서만 4개월 동안 매출 60억원을 돌파했다. 반년도 안 돼 창원중앙점과 광주상무점에도 매장을 여는 등 확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보틀벙커는 롯데마트가 올해 주요 사업으로 내세운 와인 판매 공간이다. ‘와인의 모든 것’이라는 콘셉트를 내세운 보틀벙커 매장 규모는 약 400평으로 제타플렉스 1층 전체 면적의 70%에 달한다.

수천만원짜리 와인부터 가성비 와인 등을 포함해 5000여 종의 와인·위스키·전통주 등이 있다. 주류뿐 아니라 와인 안주와 와인잔·에코백·54종 와인 향 구별 키트 등 다양한 굿즈도 판매한다.

롯데마트 매출을 견인하는 ‘효자’가 된 보틀벙커에 상품을 들여놓는 것은 90년대생 3명의 상품기획자(MD)들이다.

조선비즈는 지난 19일 서울 송파구 롯데마트 제타플렉스에서 보틀벙커 팀원들을 만났다. 수천 종의 와인을 보틀벙커에 들여놓는 김민주 MD(32), 와인과 어울리는 안주 및 굿즈를 담당하는 정슬기 MD(32), 상품 기획 및 발굴을 돕는 유승연 MD(26)가 한자리에 모였다.

고급와인을 보관하는 보틀벙커의 그랑크뤼존. 온도와 습도 등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이신혜 기자

◇ “저희도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은 몰랐어요”

롯데마트가 보틀벙커 준비를 시작한 시기는 지난해 5월부터다. 국내 와인 시장이 커지고, 와인이 대중화되면서 롯데마트는 와인 전문가인 강혜원 상무를 등용해 ‘프로젝트W’팀을 만들었다.

총 8명으로 꾸려진 태스크포스(TF)는 반년 동안 실체가 없던 보틀벙커의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챙겼다. ‘보틀벙커’라는 이름을 짓고,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출생)부터 중장년층까지 취향을 타지 않고 방문할 수 있는 그레이톤 매장 인테리어에도 관여했다. 각종 시음회와 행사에 나가며 고급 와인부터 대중성 있는 와인도 고루 들여왔다.

속전속결로 보틀벙커 매장 출범을 계획했지만,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MD들은 와인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고, 매주 1회씩 만나 시음하고 맛 평가를 진행했다. 와인 가격표에 붙어있는 QR코드를 찍으면 데이터 기반 와인 추천 스타트업 ‘와인그래프’가 제공하는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보틀벙커마다 소믈리에·와인 전문가 출신 점장을 배치해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추천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보틀벙커에만 있는 핵심 공간 ‘테이스팅탭’의 와인들도 선별한다.

제타플렉스에는 약 80여 종의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창원중앙점과 광주상무점에서는 48종의 와인 시음이 가능하다. 전용 카드에 금액을 충전하고 원하는 와인을 50mL씩 맛볼 수 있다. 가격은 1000~8000원대로 구성돼있어 비교적 부담이 적다. 소셜미디어(SNS)에서 유행하는 가성비 와인부터 가격대가 있는 와인들을 골고루 배치했다.

보틀벙커팀의 세심한 설계는 수치로 표현됐다. 제타플렉스 보틀벙커 매출은 개점 넉 달 만에 60억원을 돌파했고, 창원중앙점은 한 달 만에 8억원을 넘어섰다. 김민주 MD는 “(보틀벙커를) 준비하면서도 이렇게까지 소비자 반응이 클지는 몰랐다”고 웃음 지었다.

보틀벙커의 그랑크뤼존. /이신혜 기자

◇ ‘마트와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칼 거절했던 유통사도 이제는 입점 희망

보틀벙커팀 합류 전 와인 전문수입사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았던 김민주 MD는 국내에 소량만 입고된 ‘로마네 꽁띠’ 와인을 들여오기도 했다. 불어 전공이던 그는 불어 전공자가 갈 수 있는 회사를 찾다가 와인 전문수입사에 입사했다.

와인에 대해 아예 몰랐다는 김 MD는 와인 수입 및 통관, 브랜드 마케팅 등 와인 관련 경험을 쌓으며 전문가가 됐다. 와인 관련 전문 자격증 ‘wset’ 레벨 3도 땄다.

그가 와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어렵게 구한 8900만원짜리 로마네 꽁띠 와인 5종 세트는 지난 3월, 광주에서 올라온 고객에게 판매됐다.

‘마트에서는 저가 가성비 와인만 판매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하기 위해 고급 와인에도 힘을 줬다. 그랑크뤼(GRAND CRU) 존에서 14~18도의 온도를 유지하고, 습도 등을 관리한다. 보르도·부르고뉴 그랑크뤼 와인과 슈퍼투스칸·나파컬트 등의 프리미엄 고가 와인을 들여왔다.

처음부터 와인 수입사들이 보틀벙커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김 MD는 “몇몇 수입사에서는 ‘저희는 마트와는 거래하지 않습니다’라고 통보해 상처를 입기도 했다”고 말했다.

기존 마트 와인 코너와 차별점을 설명하기 위해 직접 수입사에 찾아가 보틀벙커의 비전과 미래 모습을 설명했다. 이제는 수입사들도 제품을 들이고 싶어 하는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고 한다.

김 MD는 “예전에는 아무리 차별점을 강조하고 설명을 해도 ‘마트’라는 이유만으로 거절당한 적이 많았는데 이제는 ‘보틀벙커’라고 말하면 호의적으로 반응하신다”고 말했다.

와인 동호회와 위스키 동호회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특정 상품이 입점할 시 전날부터 매장 앞에서 대기하는 ‘오픈런’ 현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난달 말 국내 싱글 몰트 위스키의 대가 김창수 명인의 ‘김창수 위스키’의 보틀벙커 입점 소식이 공개되자 전날 오후 6시부터 대기하던 고객도 있었다고 한다.

보틀벙커에서 단독으로 판매하는 장미꽃잼을 들고 있는 정슬기 MD. /이신혜 기자

◇”잼만 3천만원어치 팔았죠”...와인 안주도 인기 비결

보틀벙커에서는 술만 파는 것이 아니다. 정슬기 MD는 와인과 어울리는 안주와 와인 관련 굿즈들을 보틀벙커에 들이고 있다. 입사 8년 차인 그에게 아무 배경 없이 새롭게 시작하는 보틀벙커팀에 지원한 이유를 묻자 “한계 없이 내가 들이고 싶은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정 MD는 소셜미디어(SNS)와 와인 관련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와인의 향을 잘 느낄 수 있는 와인잔, 와인 안주를 예쁘게 놓을 수 있는 집기들을 유심히 보고 있다.

정 MD가 보틀벙커에 단독으로 입점시킨 피니쉬 유기농 장미꽃잼은 입소문이 돌면서 보틀벙커 대표 상품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핀란드산 유기농 장미꽃잎이 15% 들어가 치즈, 요거트, 양고기 등 스파클링 와인에 어울린다는 평가다.

파트너사에서 1인 발표(PT)를 불사하면서까지 들여온 프랑스산 콩피튀르 파리지앵 잼의 매출까지 더하면 넉 달 동안 잼 매출로만 3000만원에 달했다. 정 MD가 손수 3단 트레이에 케이크처럼 배치한 잼은 기대 이상으로 판매되며, 수입사도 매장을 찾아 감탄했다는 후문이다.

유승연 MD는 대사관에서 하는 시음회나 수입사 미팅을 갈 때 마셔본 와인 중 대중적인 선호도를 가질 만한 와인, 외형이 화려한 와인 등 특성을 가진 와인을 발굴하고 있다.

와디즈, 텀블벅 같은 펀딩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유행하는 상품들을 탐색하고, 소셜미디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와인샵이나 와인바에 찾아가 벤치마킹할 것도 찾아본다고 한다. 그는 최근에 신기한 와인을 찾았다며, 기자에게 캠핑용 와인으로 제작돼 토치에 그을려야 라벨이 보이는 ‘핀카 카바라’ 와인을 소개하기도 했다.

MD들이 직접 현장에 투입돼 지난 12일부터 나흘간 진행된 ‘와인장터’에서는 고객들이 몰려와 지난해 연말 오픈 때 기록과 유사한 4억원대 매출을 내기도 했다. 세 명의 MD가 소셜미디어를 보고 선별한 ‘일레븐미닛 로제’, ‘이탈자 로쏘’ 등 와인 초도물량이 완판됐다. 가벼운 와인잔과 3병의 와인을 넣을 수 있는 와인백, 젤리로 만들어진 숙취해소제 등의 인기가 좋았다.

이들은 앞으로 안단테데어리와 협업한 치즈 클래스, 페리에주에 샴페인 팝업스토어 등을 준비하고 있다. 향후 보틀벙커 브랜딩 작업을 확대하고 ‘스타벅스’처럼 대중적이면서 접근이 쉬운 와인샵을 만들겠다는 게 이들의 포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