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김범석 창업자가 한국 이사회 의장, 등기이사에서 사임했다. 회사 측은 김 창업자가 일본, 싱가포르 등 해외 시장 확대에 집중하고 이사회는 전문성을 가진 사내 구성원에게 맡기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김 창업자의 행보가 보수와 권한은 전문경영인보다 많으면서 법적 책임은 회피하는 대기업 오너들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18일 쿠팡에 따르면 김 창업자는 작년 12월 31일 대표직을 그만둔 데 이어 이달 11일부로 한국 이사회 의장, 등기이사직을 내려놨다. 대신 쿠팡 한국 법인을 100% 지배하는 미국 상장사 쿠팡Inc의 최고경영자(CEO) 겸 이사회 의장직은 계속 유지한다. 쿠팡의 일본 진출을 계기로 해외 시장 전략을 추진하는 데 전념하기로 했다는 게 회사의 설명이다. 후임 이사회 의장은 강한승 공동대표가 맡고, 전준희 개발총괄 부사장과 유인종 안전관리 부사장이 신규 등기이사로 선임됐다.
그러나 등기이사에서 사임하는 것이 곧 국내 경영과의 분리로 이어진다고 보는 시각은 별로 없다. 기업분석 전문기관인 한국CXO연구소가 국내 200대 그룹을 분석한 결과 총수급 지배주주 200명 중 그룹 내 상장사 이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전체의 27%에 달했다. 4명중 1명 꼴이다.
예컨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미등기 임원으로 수년째 무보수 경영중이다.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도 롯데쇼핑의 미등기 임원이고 신세계(004170)그룹은 이명희 회장, 정재은 명예회장, 정용진 부회장, 정유경 총괄사장 등 총수일가가 모두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중이다.
이들은 회사 이사회의 승인으로 이뤄지는 주요 경영 활동에 따른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우면서도 등기 임원으로서 회사를 대표하는 전문경영인보다 보수를 월등히 많이 받고 있다.
신동빈 회장이 롯데쇼핑(023530)에서 받은 지난해 보수는 13억1300만원으로 강희태 부회장(8억9400만원)의 1.5배였고 신세계 정유경 총괄사장은 29억6000만원으로 차정호 신세계 대표(13억8400만원)의 2.1배, 정용진 부회장은 33억6800만원으로 강희석 이마트(139480)·SSG닷컴 대표(20억9200만원)의 1.6배에 달했다.
김 창업자도 지난해 연봉 88만6000여달러(약 9억8000여만원)와 주식 형태 상여금(스톡 어워드·퇴직 후 일정 기간이 지나서 정해진 계획에 따라 주식으로 받는 일종의 상여금) 등 총 1434만1229달러(158억원 상당)를 받았다.
쿠팡은 김 창업자가 해외 사업에 집중한다고 밝혔지만, 국내 사업과 관련한 의사결정에서 완전히 손을 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네이버를 창업한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도 2017년 이사회 의장, 2018년에는 사내이사직을 내려놨지만 해외 사업과 인수합병(M&A)을 주도할 뿐 아니라 국내 사업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난 3월 네이버와 이마트가 2500억 원 지분 교환을 하기 전에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만나러 간 것도 이해진 GIO였다.
김남은 대신경제연구소 지배구조연구소 주주활동팀장은 “실질적으로 기업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일원화 해야 한다. 총수가 실질적으로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측면을 고려할 때 총수의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등기 임원으로 등재하는 게 중요하다”며 “이런 문제들은 대기업 뿐 아니라 중견기업, 쿠팡과 같은 신생기업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범석 창업자는 국내 등기이사에서 사임하면서 내년 1월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상 처벌대상에서 완전히 빠지게 됐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여야가 올해 1월 통과시킨 이 법은 사업장에서 △사망자 1명 이상 발생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 2명 이상 발생 등을 초래한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안전·보건 확보 의무가 미비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의 벌금을, 법인이나 기관에게 50억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법에서 처벌대상이 되는 사업주는 ‘자신의 사업을 영위하는 자, 타인의 노무를 제공받아 사업을 하는 자’를 말하고 ‘경영책임자’는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또는 이에 준하여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쿠팡의 경우 김 창업주가 대표직을 내려놓은 뒤 강한승 대표가 경영관리 총괄 부문을 맡고 있고, 이번에 신규 사내이사로 선임된 유인종 부사장인 안전관리 부문을 책임지고 있어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두 사람이 처벌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쿠팡은 전국에 170여개의 물류거점을 두고 1만5000명의 쿠팡친구(옛 쿠팡맨)를 직접 고용하고 있다. 배송 인프라 운영 규모가 국내에서 가장 큰 만큼 사건사고도 잦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지난 7일 ‘쿠팡물류센터지회(쿠팡 물류센터 노조)’를 설립하면서 “1년 간 노동자 9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17일 경기도 이천 덕평물류센터에서 발생한 화재사고는 30시간째 진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국내 사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아무런 직책이 없는 김 창업자를 처벌할 규정은 없다. 이런 지적에 대해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산업재해 예방 태스크포스(TF) 단장(최고위원)은 “애초 법을 제정한 취지가 오너를 처벌하자는 게 아니라 기업이 중대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책임자를 지정하고, 관련 책임을 이행하도록 하려는 것”이라며 “다만 법이라는 게 규제망을 빠져나가는 사례가 생길 수 있다. 그런 문제는 조금 더 앞으로 고민을 해나가야 할 부분인 것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김 창업자가 등기이사직을 내려놓은 것이 공정거래위원회가 매년 지정하는 동일인(총수)이 되지 않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시각도 있으나 공정위는 등기이사에서 사임한다고 해서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없는 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도 등기이사직에서 내려왔으나 공정위는 그를 동일인으로 지정했다.
성경제 공정위 기업집단정책과장은 “국내 법인의 이사회 의장, 등기이사를 사임해도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다”며 “다만 (동일인 제도 개선방안) 연구용역을 발주했고 결과가 나와봐야 판단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공정위는 지난 5월 김 창업주의 경영상 영향력은 인정하면서도 외국 국적이란 이유로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아 논란이 제기되자 ‘공정거래법상 동일인 제도 개선방안’ 연구용역을 이달 1일 발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