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업 수도이자, 지역내총생산(GDRP) 전국 1위 '부자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지역이 있다. 지난 60여 년간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산업도시로 꼽히는 '울산'이다. 그러던 울산이 위기에 직면했다. 제조업 내 위상이 바뀌고 다수의 정규 생산직이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더는 정규직을 뽑지 않는 상황이다. 울산의 3대 산업 현장과 도시는 어떠한 운명을 맞게 될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책이 나왔다.
'조선소 출신 산업사회학자'로 주목받으며 반향을 일으켰던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가 낸 신간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는 울산이 직면한 제조업 위기에서 출발해 4차 산업혁명과 기후 위기라는 새 당면과제를 마주한 한국의 앞날을 논쟁적으로 다룬 책이다.
역사적으로 불황기에는 세계 많은 산업도시가 쇠락을 경험한다. 영국 북잉글랜드의 맨체스터와 리버풀, 미국 북부의 러스트 벨트 등 선진국의 산업도시 대부분이 위기 상황에서 쇠락하며 왕년의 영화를 쉽게 되찾지 못했다. 일본 이마바리나 기타큐슈 같은 산업도시에서 이주 노동자와 노인만 생산직으로 고용하면서 공장을 운영한다.
우리나라의 울산 역시 마찬가지다. 울산의 위기는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호황의 한복판을 거치며 내부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석유화학 산업은 국제 수급 사이클이 바뀔 때마다 수익이 출렁였고, 자동차는 1998년의 대규모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 충돌을 비롯해 크고 작은 분규에 휩싸였다. 호황기가 끝난 조선 산업은 2010년대에 들어서 구조조정에 직면했다. 이를 전후로 제조업 전반에 대한 위기감이 사회 전반 퍼져 나갔다.
책은 울산을 비롯한 한국 경제가 처한 제조업 위기론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대한민국은 산업화 초부터 당시의 제조 선진국인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 도면을 베끼거나 완제품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원리를 익히는 역설계 방식으로 기술을 따라잡으며 이 자리까지 왔다. 한국 제조업이 기본설계 역량이나 원천 기술이 없다 보니 양산을 위한 사고나 소재·부품·장비(일명 소부장) 하도급 업체를 쥐어짜는 방식으로만 산업을 영위해 혁신의 한계에 부딪힌다. 이대로라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제조 선진국의 원천 기술을 따라잡지 못하고 중국을 위시한 개발도상국의 원가 경쟁에 쫓기는 샌드위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빠른 추격자(fast-follower)'에서 '최초의 선도자(first mover)'로 변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제조업 강국의 깃발을 내려도 괜찮은 시점일까.
저자는 책에서 "대한민국의 제조업은 붕괴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중공업 등 제조 대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이미 '최초의 선도자' 위치에 서 있는 산증인이다. 기본설계도 수행할 수 있다. 소부장을 제공하는 기업들 중 1차 협력 업체의 역량도 점차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연구개발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대한민국의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도 세계 1등이다.
제조업의 위기와 울산의 위기는 분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울산과 같은 산업도시는 어떻게 부활할 수 있을까. 저자는 해외의 여러 선발 사례들을 검토한다. 세계 최대 자동차 도시였던 디트로이트와 1970년대까지 철강 도시로 명성을 떨치던 도시 피츠버그의 사례를 든다. GM(제너럴 모터스), 포드, 크라이슬러까지 3개 자동차 회사가 있었던 디트로이트는 1950년대에 인구 150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고, 1970년대부터 일본 자동차에 밀려 고전하다가 2009년 GM의 파산까지 겪으며 쇠락했다. 도시 재활성화를 40년가량 진행한 피츠버그 인구는 감소했고, 도시 전체 관점에서 소득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반면 디트로이트는 지금도 생산직 비율이 20%를 넘길 정도로 노동자의 기존 일자리를 지켜냈다. 저자는 "주력 제조업의 위기 상황을 전환의 관점에서 적극 대응하지 않을 경우 도시 자체가 쇠퇴할 수 있다"면서 "3대 산업이 여전히 건재한 울산에서는 현 위치에서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은 울산의 제조업 붕괴 외에도 또 다른 사회적 문제를 꼬집는다. 저자는 울산 쇠퇴의 한 이유로 '산업 가부장제'의 문제를 꼬집는다. 산업 가부장제는 특정 산업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의 불균등한 성별 분업 구조가 만들어 내는 가부장제를 의미한다. 울산은 생산직 노동자 외벌이로도 중산층 수준의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노동자 중산층'의 꿈을 실현한 도시다. 이러한 발전 경로에서 울산은 산업 가부장인 아버지들의 일자리는 지켰지만 역설적으로 그 자녀들이 들어갈 일자리는 사라졌으며, 최근 10년간 여성 고용률은 전국 최저 수준을 맴돌았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일반적인 가부장제의 기준으로 볼 때 보수 정서가 강한 대구 경북보다 여성의 노동 시장 진입에 더 냉담했던 도시가 울산이다. 산업 가부장제에 관한 저자의 논의는 독자들에게 젠더와 계급 계층 갈등에 대한 현실 기반의 이해를 돕는다.
책에서는 울산 대학이 말 그대로 '빚 좋은 개살구'가 됐다는 점도 지적한다. 울산은 세계적 수준의 3대 산업이 포진한 유리한 환경을 구축해 왔지만, 산·학·연 협동 모델이 구현되지 못하는 비극을 맞고 있다. 저자는 "울산 대학들은 정규직을 뽑지 않는 지역 노동 시장과 거의 대부분의 연구개발(R&D) 기관이 천안 분계선 너머에 존재하는 현실에서 지방대학 한계에 갇히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대학을 바탕으로 주 정부의 지원과 벤처 캐피털이 결합해 첨단 산업의 성장을 선도한 실리콘밸리와 극명히 대조되는 사례라고 꼬집는다. 청년과 여성이 떠나는 도시는 의미를 확장해보면, 오늘날의 한국에 대한 진단이기도 하다.
저자는 기후 위기 등 다가올 글로벌 환경 변화에 대응해야 도시가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가올 RE100, 수소경제, 기후 위기 등 새로운 글로벌 환경 변화가 울산 3대 산업과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목차에서는 한국의 산업도시들과 우리나라 제조업 앞날, 대한민국호의 미래 비전까지 당면한 과제를 살펴본다.
저자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울산 용접공이었고 자신도 대학 졸업 후 조선소에서 일했다. 그는 "평범한 노동자도 중산층이 될 수 있는 사회의 꿈을 포기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양승훈 지음ㅣ부키ㅣ432쪽ㅣ1만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