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잠실 한복판에 롯데월드타워가 솟아있다. 전청조(27)는 이 건물 42~71층에 자리한 오피스텔 '시그니엘 레지던스'를 단기임대한 뒤 범행 대상들을 초대해 자기 재력을 믿게 만드는 식으로 사기 행각을 벌였다. /롯데물산 제공

“라운지에 있는 파티룸이나 미팅룸에 사람이 차있는 걸 보면 요새는 의심부터 들더라고요. 그렇다고 직원이 파티룸, 미팅룸까지 따라 들어가서 뭘 하는지 감시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전청조같은 사기꾼을 막을 뾰족할 방법이 딱히 없는 거죠. 기분이 참 답답하고 불쾌하고 그렇습니다.”

8일 오전 서울 송파구 잠실에서 만난 50대 남성 A씨가 한 말이다. 올해로 4년째 시그니엘 레지던스에 거주 중인 A씨는 “조용하고 편리한 주거환경을 생각하며 비싼 돈 주고 들어왔는데 최근에는 이곳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라며 “가깝게 지내는 입주민들 중에는 시그니엘이 ‘사기꾼 성지’가 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롯데월드타워 42~71층에 자리하고 있는 최고급 오피스텔 시그니엘 레지던스에 ‘사기 온상지’라는 꼬리표가 붙고 있다. 재벌 3세 행세를 하며 27명으로부터 30억원이 넘는 돈을 가로챈 전청조(27)씨를 비롯해 여러 사기꾼들이 피해자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시그니엘을 이용해 온 탓이다.

◇ 전청조, 시그니엘 전면 내세워 범행 계획

'재벌 3세'를 사칭하며 사기 행각을 벌인 혐의로 구속된 전청조씨(27)가 지난달 10일 서울 송파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뉴스1

경찰에 따르면 전씨는 월세 3500만원에 3개월 단기임대한 시그니엘 레지던스에 범행 대상을 초대했다. 자신이 조 단위 자산가임을 피해자들이 믿도록 만든 뒤 투자금을 뜯어내기 위해 시그니엘 레지던스를 이용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씨는 롯데월드타워 42층에 있는 입주민 전용 미팅룸에 시그니엘 레지던스 입주민을 초대해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강연 당시 전씨는 “태어나자마자 다이아몬드 수저였다”, “스타트업이 내 컨설팅을 받으려면 3억원은 내야 한다”와 같은 말로 원래 시그니엘 레지던스에 살던 사람들 상대로까지 사기 행각을 벌였다.

전청조 이전에도 시그니엘 레지던스를 무대 삼아 사람들을 현혹하는 시도가 꾸준했던 것으로 보인다. A씨는 “입주한 뒤로 지인을 초대하거나 가족행사를 할 때 42층 파티룸을 빌리곤 한다”라며 “작년까지는 파티룸을 빌리면 간단한 이용 안내문만 받았는데 최근에는 ‘기업활동, 마케팅, 강연 등 상업적 이용은 어렵다’는 내용의 유의사항도 함께 딸려온다”고 했다.

◇ 코인 사기꾼, 유튜버도 ‘재력 과시’ 위해 활용

지난 2020년 부부 유튜버 '카걸(Cargirl)'에 올라온 시그니엘 관련 영상 중 일부. /유튜브 캡쳐

롯데월드타워 76~101층에 있는 시그니엘 호텔로 범행 대상을 불러 현혹시킨 경우도 있다. 현재 코인 사기 혐의로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탁 모(44)씨가 그 사례다. 그는 지난 2019년 시그니엘 호텔방으로 피해자들을 부른 뒤 자신에게 비트코인을 투자하면 투자금의 몇 배를 돌려주겠다며 피해자들을 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그니엘 호텔 하루 숙박비는 방 형태에 따라 적게는 50만원, 많게는 800만원 수준이다.

재력과 인맥을 과시하는 영상들로 30만명 넘는 유튜브 구독자수를 모았던 부부 유튜버 ‘카걸’도 시그니엘을 이용했다. 이들은 지난 2020년 자신들이 시그니엘 레지던스에 사는 것처럼 꾸며낸 영상을 공개했다. “시그니엘 살아도 산책은 석촌호수에서 하느냐”는 구독자들 댓글에 “정확하다”고 말하는 등 시그니엘 레지던스에 살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그니엘 레지던스에 정말로 사는 게 맞느냐는 누리꾼 문의가 빗발치자 카걸 측은 해당 영상을 비공개 처리했다. 이들이 유튜브를 통해 과시한 재력과 인맥이 대부분 조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뒤에는 아예 유튜브 채널을 비공개로 돌린 뒤 잠적했다.

◇ “단기임대 쉬운 시그니엘, 사기 무대로 안성맞춤”

롯데월드타워 시그니엘 레지던스 야경. /롯데건설 제공

사기꾼들이 시그니엘을 범행에 활용하는 이유는 상류층만이 접할 수 있는 최고급 시설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지난 2017년 준공된 시그니엘 서울은 높이 123층으로 국내 건물들 중 층수가 가장 많다. 206㎡짜리 전용면적에 입주하려면 월세가 2500만원, 관리비가 250만~300만원 수준이다. 매달 3000만원 남짓한 돈을 내야 이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들은 실제 투자 사기 피해자들 의뢰를 받고 증거물을 모으다 보면 피의자가 본인 SNS(소셜미디어)에 시그니엘에 거주하는 걸 과시하는 사진과 영상이 나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했다. 법무법인 주원의 김진우 변호사는 “사기 가해자들은 범행 대상을 속여야 하기 때문에 집, 자동차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매우 중시한다”라며 “그런데 시그니엘 레지던스는 아파트가 아니라 비교적 단기임대가 쉽다”고 했다. 그는 이어 “이 때문에 시그니엘이 사기 무대로 많이 악용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