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으면서 길을 걷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도와주지 않는다.” (2021년 서울 강동구에서 일면식도 없는 60대 남성을 살해한 40대 남성)

“이유없이 자살하려 했으나 이렇게 자살하는 것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1년 5월 경기도 성남시에서 처음 보는 60대 택시기사를 살해한 20대 남성)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일명 묻지마 살인(이상동기범죄)에 대한민국이 또 한번 발칵 뒤집혔다. 21일 대낮에 유동인구가 많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복판에서 조 모(33) 씨가 칼로 행인 1명을 살해하고 3명을 다치게 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22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 현장에서 한 어린이가 이번 사건으로 희생 당한 피해자를 추모하며 헌화 뒤 기도하고 있다./ 뉴스1

일명 ‘신림 칼부림 사건’처럼 모르는 타인에게 본인의 불만과 적대감을 폭발시키는 유형의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판결문을 보면 어린 시절 경험한 실패와 사회적 고립, 이런 자신의 상황이 사회나 타인 때문이라는 피해망상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람들이 청소년기 범죄를 저지르면서 성장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형사사법제도 틀 안에서 철저한 관리와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봤다. 조 씨 역시 폭행 등 전과 3범이며 미성년자 때는 법원 소년부로 14차례 송치된 전력이 있으나 교정이 되지 않고 흉악범으로 자라났다.

◇ 개인적 불행과 사회적 고립, 갑작스런 실패가 ‘트리거’

“놀이터에 앉아 있는데 맞은편에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2010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다세대 주택 옥탑방에서 자녀와 함께 TV를 보던 장 모(42) 씨 머리를 둔기로 내려치고 장씨의 남편 임 모(42) 씨를 살해한 윤 모(33) 씨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림 칼부림 사건의 범인 조 씨도 경찰 수사 초기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며 “분노에 가득 차 범행을 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국내 학계에선 이런 류의 묻지마 범죄 유형을 정신장애를 가진 유형과 별개로 본다. 범죄를 저지르는 원인이 편집증이나 망상 장애 등 정신병력이 아니라 삶의 만족도가 낮고 사회에 대한 적대감이 큰 상태에서 공감 능력이나 분노 억제 능력이 결여돼 분노를 타인에게 능동적으로 표출한다는 것이다. 범죄 대상도 성공적으로 분풀이를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불특정 다수 중에 선정하는 경향이 있다.

수사기관은 ‘묻지마 범죄’를 특정 범죄 유형으로 보지 않고 있어 공식적으로 발표된 통계는 대검찰청이 지난 2017년 국정감사 때 제출한 자료가 전부다. 당시 대검 자료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는 2010년 이후 증가 추세이며 기소된 사건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연평균 54건이다. 이후에도 매년 모르는 사람을 살해하고 본인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대는 범죄자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림역 인근 상가 골목에서 행인을 상대로 무차별 흉기를 휘두른 조모씨가 23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묻지마 범죄를 연구한 국내 논문과 최근 2년 간 검찰이 ‘묻지마 범죄’라고 명시해 기소한 사건의 1심 판결문을 보면 성장 과정에서 경험한 실패와 사회적 유대감이 낮은 단절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갑작스런 해고·이혼·경제적 손실 등이 트리거(방아쇠)가 된 경우가 많았다. 상당수는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 ‘나를 죽이려 한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경기 침체와 과도하게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가 묻지마 범죄의 원인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경제적 약극화가 두드러질 경우 상대적 박탈감이 심화되고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비관이 사회 전반에 대한 막연한 분노로 나타나 묻지마 범죄라는 폭력적인 양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의 묻지마 범죄를 뜻하는 도리마(通り魔·길거리의 악마) 범죄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배경에도 경기 침체와 비정규직, 히키고모리(은둔외톨이) 증가가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묻지마 범죄를 줄이기 위해선 기본적인 통계 자료 수집과 고위험군 대상자에 대한 체계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봤다. 특히 조 모 씨처럼 청소년기부터 타인에게 분노를 전가하는 유형의 범죄를 지속적으로 저지른 사람에 대해선 위험성 평가와 모니터링이 필수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전과가 누적된 사람에 의한 묻지마 살인은 형사사법제도의 실패 때문”이라며 “우리나라는 소년사건 기록은 전과로 남지 않아 성인 범죄자 관리와 완전히 분절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행 형사사법제도가 소년사범에 지나치게 관대한 측면이 있어 계속 회전문처럼 범행을 반복하다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