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전 11시 30분쯤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편의점. 편의점에 캔커피를 구매하러 온 최정금(43)씨는 가게 매대 앞에서 한참 동안 서 있어야 했다. 최씨는 탄산음료, 이온 음료에 이어 밀크티 음료, 에너지 드링크 음료 등 다양한 종류의 음료수들을 이것저것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10분 가까이 지나자 최씨는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 겨우 캔커피를 구매할 수 있었다.

최씨는 중증 시각장애인이다. 손끝에 닿는 점자로만 제품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최씨가 점자를 통해 구분할 수 있는 음료수 종류는 ‘음료’ ‘탄산’ ‘맥주’ 그리고 ‘모름(점자 없음)’ 4개뿐이다. 최씨는 “비장애인들은 자신의 기호에 맞게 제품을 고르지만, 시각장애인은 음료의 브랜드나 제품명은 물론 종류조차 알 수가 없다”며 “원하는 제품을 직접 구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음료와 탄산으로만 점자 표기가 되어 있는음료품(왼쪽) 점자 표기가 되어 있는 의약품(오른쪽) /김수정 기자

식료품 등에 점자 안내가 의무가 아니다 보니 시각장애인의 상품 선택권이 제한되고 있다. 점자 표시가 있더라도 단순히 음료, 탄산, 맥주 등만 구분할 수 있는 정도다. 이에 점자 표기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식품산업협회가 작년 7월 회원사 161곳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 95%에 해당하는 154곳은 점자 표기를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점자를 표기한 제품 중에서도 상품명까지 알 수 있는 제품은 단 4개에 불과했다. 결국 시각장애인은 음료수를 구매할 때 점자 표기가 있더라도 탄산음료인지 여부만 알 수 있을 뿐 그게 콜라인지 사이다인지 구별할 수 없는 셈이다. 그밖에 컵라면이나 과자 등 대부분 식품 제품은 점자조차도 없는 실정이다.

의약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실제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한 약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의약품 중 점자 표기가 된 것은 1개에 불과했다.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김주영(32)씨는 “머리가 아픈데 복통약을 먹거나 처방용량을 지키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며 “의약품의 경우 대다수 포장이나 디자인이 비슷해서 구분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했다.

2020년 식약처가 조사한 전체 의약품 4만4751개 가운데 점자가 표기된 제품은 단 94개로 0.2%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점자로 약 이름은 표시돼 있다 해도 유통기한이나 효능, 주의사항 같은 핵심 정보는 적혀 있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다.

점자가 있더라도 판독할 수 없게 엉터리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점자가 최소 0.2cm는 넘어야 점자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데, 점자가 마모되거나 포장지가 얇아 기준치를 넘지 못하는 것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이런 점자들은 있으나 마나”라며 “점자의 양만 늘리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는 점자로 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문가들은 시각장애인에게 점자는 언어라는 점에서 점자 표기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지적한다. 김훈 한국시각장애인협회 단장은 “비장애인에게 국어가 언어이듯, 점자도 시각장애인에게 글”이라며 “모든 시각장애인이 본인이 원하는 상품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점자 표기 법제화가 시행돼야 한다”고 했다. 이어 김 단장은 “이와 함께 점자 규격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함께 법제화해, 시각장애인의 점자 가독성을 높여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