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모습. /뉴스1

응급실에서 의료진을 폭행하고 시설을 부순 피고인이라도 빈곤 때문에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다면 국선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1심 재판부가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쳐야 마땅하다"고 질책했던 사건이지만, 대법원은 2심이 피고인의 국선변호인 신청을 기각한 채 재판을 진행한 것은 방어권 침해라고 봤다.

대법원 제3부(주심 이수연 대법관)는 지난 4월 30일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 사건 상고심에서 벌금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해 7월 22일 오전 7시 25분쯤 부산 사하구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왼쪽 종아리 상처 등을 진료받던 중 응급과장인 의사에게 욕설을 하며 고성을 지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주먹을 휘둘러 응급의료용 시설을 손상시키고, 이를 제지하는 응급과장의 오른쪽 팔꿈치를 힘껏 잡아당겨 폭행한 혐의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다른 응급환자에 대한 진료도 방해된 것으로 조사됐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사회봉사 120시간을 명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2006년부터 2021년까지 폭력, 음주운전 등으로 사회질서를 어지럽혀 오고도 줄곧 벌금형 선처만 받아왔다"면서 "그러나 준법 시민으로 거듭나기는커녕 응급실에서 갖가지로 행패를 부려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에 대한 진료를 방해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에야말로 다시는 국법질서를 능멸하지 못하도록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쳐야 마땅하다"고 했다. 다만 A씨가 뒤늦게 피해자에게 110만원을 지급하고 합의한 점은 양형에 반영했다.

2심 판단은 달랐다. 2심은 피해자가 A씨와 합의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하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한 1심 형이 무겁다며 벌금 600만원으로 감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2심 재판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고 봤다. A씨는 2심 재판을 앞두고 자신이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상 기초생활수급자라며 국선변호인을 선임해 달라고 청구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기각했고, 이후 A씨만 출석한 상태에서 심리를 진행했다.

대법원은 A씨가 빈곤 때문에 사선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원심은 피고인이 국선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효과적인 방어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