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고법 302호 법정에서는 국내 미술계 거장 이우환 화백 작품으로 알려진 '점으로부터 No. 800298'을 두고 국내 대표 감정 기관들이 정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한쪽은 위작이라 했고, 다른 한쪽은 진품이라 맞섰다. 그림 한 점을 둘러싼 공방이었지만, 법정이 따지는 질문은 단순했다. 무엇을 근거로 진짜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작품은 김상민 전 부장검사가 김건희 여사 측에 전달한 것으로 지목된 그림이다. 작품이 진품으로 인정돼 100만원이 넘는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청탁금지법 위반 여부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면 김 전 검사 측은 "해당 작품은 위작으로 가치가 없다"는 입장이다.
재판이 끝난 뒤 법조계 안팎에서는 "작가 본인을 법정에 세워 직접 물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다. 그러나 정작 김 전 검사 측과 이를 기소한 특검 모두 이우환 화백을 증인으로 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법원이 작품의 진위를 판단하는 방식이 일반인의 상식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 "2016년 위작 사건서 법원이 이 화백 진술 배척"
법조계에서는 2016년 '이우환 화백 대규모 위작 사건'을 그 배경으로 꼽는다. 당시 서울 인사동 일부 화랑에서 이 화백의 작품으로 속인 위작 수십 점이 유통됐고, 경찰은 이 가운데 13점을 압수해 수사에 나섰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와 위조에 관여한 인물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경찰은 위작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 화백은 2016년 6월 27일과 29일 두 차례 직접 경찰서를 찾아 그림들을 모두 살펴본 뒤, 경찰과는 다른 판단을 내렸다. 작품 전부가 자신이 그린 진품이라는 취지였다. 그는 "13점 중 한 점도 이상한 것을 찾지 못했다. 호흡, 리듬, 채색 쓰는 방법이 모두 내 것이다. 작가는 자기 작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이어 6월 30일 기자회견도 열어 "내가 작가(作家)다. 왜 내 말을 믿지 않느냐"고 호소했다.
경찰은 그럼에도 위작을 전제로 수사를 이어갔다. 위조범들의 계좌에서 돈이 오간 기록뿐 아니라 진품의 느낌을 내기 위해 문제의 그림에 인위적으로 대리석 가루와 유리 가루를 안료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국과수의 분석이 근거였다. 위작 사건에 연루된 이들도 결국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 판단도 다르지 않았다. 이듬해 1월 서울중앙지법은 사서명위조 등 혐의로 기소된 위작 총책 등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과수 감정과 관련자 진술 등을 토대로 작품이 위작이라고 보고, 이 화백이 경찰에 밝힌 "모두 진품"이라는 취지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여러 정황상 위작 가능성이 짙은데도 작가 의견만으로 이를 뒤집기 어렵다고 봤다. 재판부는 "복수 전문가의 감정 의견에서도 인위적인 노후화 작업 등 이 화백의 다른 작품에는 없는 피고인들만의 고유한 특징이 발견됐다"며 "작가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피고인들의 신빙성 있는 진술과 사실관계를 고려하면 작가의 의견을 더 우월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들에게 선고된 징역형은 이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법조계 관계자는 "이번 사건에서 특검이 이 화백을 증인으로 부르지 않은 건 2016년 위작 사태 당시 법원이 그의 진술을 배척했던 점이 고려됐다"며 "당시에도 작가 본인 증언만으로도 결론이 나지 않았고, 지금 이 화백이 고령인 점도 고려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1936년생으로 올해 90세다.
◇"공신력 있는 단일 감정 기관 부재한 탓"
미술계에서는 이번 논란이 한국 미술품 감정 시스템의 한계를 다시 드러냈다고 본다. 국내 최대 감정 기구였던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이 2018년 문을 닫은 뒤, 현재는 한국화랑협회와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등 민간 기관들이 사실상 감정을 주도하고 있다. 화랑업계 중심 조직과 학예사·큐레이터 중심 조직이 각기 다른 판단을 내리는 구조다.
과거 고(故)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논란도 같은 문제를 보여줬다. 작가 본인은 "내 그림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전문가 감정과 검찰 판단은 달랐다. 작가의 확신과 제도권 감정이 충돌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결국 법정은 '누가 그렸다'보다 '무엇으로 입증되느냐'를 본다. 작가의 눈, 감정가의 경험, 거래 시장의 평가가 엇갈릴 때 최종 판단 기준은 객관 자료와 증거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우환 화백이 법정에 서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 법조계의 설명이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각 화랑협회나 민간 감정 기구들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다 보니 이해관계에 따라 혹은 감정 위원 구성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미술품 감정 인프라 구축이나 '감정 이력 관리제' 도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