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익 변호사가 2021년 2월 9일 서울 동작경찰서에서 기준치의 612배를 초과하는 환경호르몬이 검출된 아기욕조 제조업체(대현화학공업)와 유통업체(기현산업)를 상대로 형사고소장을 접수하기 전 입장을 밝히고 있다./뉴스1

기준치 612배가 넘는 환경호르몬이 검출된 아기 욕조 제조사가 소비자 160명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1심에서는 환경호르몬이 검출된 욕조를 사용했더라도 소비자들에게 손해가 발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지만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지난 2014년 ‘어린이제품법’이 제정된 후 100명이 넘는 소비자가 집단소송을 제기해 제조사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인지능력 부재로 현재 발생하지 않은 아이들의 정신적 고통을 사전에 인정한 점도 이례적이다.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4부(부장판사 이광만 이희준 정현미)는 A씨 등 소비자 160명이 아기 욕조 제조사 대현화학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1심 판단을 뒤집고 “피고는 원고에게 각 10만원을 지급하라”고 밝혔다.

대현화학공업이 제조한 아기 욕조는 생활용품 전문점 다이소에서 5000원에 판매되며 ‘맘카페’ 등에서 ‘국민 아기 욕조’로 불릴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욕조에는 ‘국가통합인증마크(KC)’가 부착돼 있었다. 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은 2020년 12월 아기 욕조 배수구 마개에서 기준치를 612배 넘는 프탈레이트계 가소제가 검출됐다며 전량 제품 회수 명령을 내렸다. 프탈레이트계 가소제는 간 손상과 생식기능 저하를 유발할 수 있는 유해 화학물질이다. 다이소는 “영수증·상품의 손상 유무와 관계없이 전국 다이소 매장에서 환불 조치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비자들의 반발이 심해지면서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는 아기 욕조 제조사인 대현화학공업과 중간 유통사인 기현산업에 정신적 피해를 본 소비자들에게 위자료로 5만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해 어린이제품 안전 특별법(어린이제품법) 위반 혐의로 이들을 불구속 기소하고, 각 업체 대표도 사기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소비자들은 법적 대응에도 나섰다. 소비자 408명은 2021년 50만원의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제조사가 ‘어린이제품법’과 ‘표시광고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원고 명단에 아기 이름을 올리고 부모가 법정대리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1심에서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욕조 구매와 실제 사용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욕조 마개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됐더라도 피부 등을 통해 소비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법원 판단에 불복한 소비자 160명은 항소장을 제출했고, 항소심에서 결과는 뒤집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어린이 건강을 보고 및 증진’이라는 어린이제품법 제정 이유를 거론하며 영유아인 소비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KC가 부착돼 부모들은 욕조가 어린이제품법상 안전기준을 준수한 제품으로 신뢰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자녀들의 신체에 유해한 것인지와 별개로 어린이제품법상 안전기준에서 정한 기준치를 상당히 초과하는 유해 물질이 함유된 제품이라는 점을 알았다면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부모들은 결과적으로 피고의 거짓 KC를 신뢰해 욕조를 구매해 자녀들의 목욕에 사용했고, 자녀들은 안전기준을 600배 이상 초과하는 유해 물질이 함유된 물마개가 부착된 욕조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부모들은 자녀들을 유해 물질에 노출했다는 자책감은 물론 성장 과정에서 신체장애를 겪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겪었다”며 “자녀들이 조만간 인지능력을 갖추게 됨에 따라 정신적 고통이 현실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