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아시아나그룹 로고.

수십년에 걸쳐 성장한 기업은 사명(社名)에 값을 매긴다. 해당 사명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상표권을 출원해 제3자가 도용하지 않게 관리한다. 일부 대기업 지주회사는 상표권을 관리하는 업무를 전담한다. 지주회사는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그 이름을 공유하는 계열사로부터 사용료를 받는다.

1946년 운송업을 기반으로 회사를 대기업 집단으로 키워낸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초대 회장은 사명을 자신의 호인 ‘금호(錦湖)’로 했다. 회사 설립으로부터 60여년 , 2세들이 경영을 맡은 금호건설(구 금호산업)과 금호석유화학은 금호라는 이름 사용을 두고 10년간 법정 공방을 벌였다. 금호건설은 금호석유화학에 상표사용료를 달라고 했지만 금호석유화학이 공동소유권을 주장하며 부딪혔다.

법무법인 화우는 금호석유화학을 대리해 1, 2심은 물론 대법원까지 완승을 거뒀다. 소송에 참여한 이근우 변호사(사법연수원 35기)는 “누가 실제 상표 권리자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금호석유화학, 실질적 경영 분리하자 금호건설 “상표사용료 지급하라”

창업주에게 경영을 이어받은 2세들은 그룹을 안정적으로 경영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2006년 금호건설과 금호석유화학 ‘양대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하는 작업을 본격화 한다. ‘금호’라는 상표 명의는 2007년 3월쯤 금호건설과 금호석유화학이 50%씩 지분을 갖는 명의 이전이 이뤄졌다. 석달 후에는 지주회사에 상표사용료를 낸다는 내용의 ‘상표사용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에는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이 있었는데, 바로 “갑(금호산업)과 을(금호석유화학)은 대상상표의 공동소유자이나 실제 권리자는 갑임을 인식하고”라는 문구다.

그런데 2007년 7월 개정된 공정거래법에 따른 지주회사 요건을 금호석유화학이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우여곡절 끝에 금호석유화학은 2009년부터 금호그룹과 계열분리를 추진했고 이 작업은 2015년 마무리 된다.

(왼쪽부터)법무법인 화우 소속 이준상 경영담당변호사, 김철호 변호사, 박재우 변호사, 이근우 변호사, 설지혜 변호사. 이들은 금호가(家)에서 벌어진 '상표권 분쟁' 사건을 대리했다.

2011년 무렵부터 금호건설은 ‘상표사용계약’을 근거로 금호석유화학에 상표사용료를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금호석유화학은 ‘공동명의자’로서 상표를 사용할 권리를 가진 이상 상표사용료를 지급할 의무가 없다며 맞섰다. 상표사용료계약이 실질적으로는 지주회사 운영비용을 계열사가 분담하기 위해 작성된 것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또 금호석유화학이 금호건설과 실질적으로 계열 분리가 된 만큼, 더는 해당 비용을 분담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금호건설은 2013년 금호석유화학에 상표권 이전 등록 등에 관한 소송을 제기했다. 금호건설은 금호석유화학 명의로 등록된 ‘금호’라는 지분이 ‘명의신탁’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상표권 지분 이전과 미지급 상표사용료 등을 청구했다. 청구금액은 238억원에 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액수는 늘어날 수밖에 없어서 소송 결과에 따라 2000억원까지 물어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당초 금호석유화학은 다른 대형 법무법인에 사건을 맡겼다고 한다. 해당 법무법인은 “갑(금호산업)과 을(금호석유화학)은 대상상표의 공동소유자이나 실제 권리자는 갑임을 인식하고”라는 문구에 에 대반 반박 논리를 찾지 못했다. “실제 권리자가 ‘갑(금호산업)’”이라는 문구 때문에 명의신탁이 이뤄졌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화우는 집요하게 빈틈을 찾아냈다.

설지혜 변호사(사법연수원 36기)는 “해당 문구는 관계에 대한 확인의 표현일 뿐이고 명의신탁이라는 법률행위를 한 처분문서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설 변호사는 “금호건설은 자신들이 상표권의 실질적 권리자로서 해당 권리가 자신들에게 귀속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상표법 법리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고 설명했다.

금호석유화학 여수 공장./금호석유화학 제공

◇”명의신탁 시점 특정 못 한 금호건설…'랜드마크’ 될 판결”

화우는 금호건설과 금호석유화학 사이에서 벌어진 명의 이전과 계약 순서에 주목했다. 이 변호사는 “금호석유화학은 2007년 3월부터 이미 명의자이고 2007년 6월 계약은 명의신탁과 관련이 없다는 논리가 생겼다”며 “명의신탁에 대한 약정이 언제 있었는지에 대한 시점이 불분명해졌다”고 덧붙였다. 금호건설은 명의신탁을 주장하면서도 이에 대한 시점을 특정하거나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12부는 2015년 7월 금호석유화학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상표사용계약’을 명의신탁이 아닌 지주회사의 운영비용을 충당하는 목적으로 체결된 계약으로 봤다. 금호건설 측은 법원 판단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2018년 2월 서울고등법원은 항소를 기각했다. 금호건설은 법률 대리인을 바꾸며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올해 5월 18일 “원심 판단은 정당하고 상표권이나 상표지분의 명의신탁 약정 등 법리 오해와 이유 모순 등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이 변호사는 “금호석유화학도 상표 소유권자인데 금호건설에 돈을 주게 되면 상표법 법리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공정거래법상 부당지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2007년 양대지주회사 체제로 가려는 계획이 무산된 후 지주회사 운영 비용 조달 방식을 고민하다 상표사용계약을 만든 것”이라고 언급했다.

설 변호사는 “사실 상표법 법리상 ‘상표의 실제 권리자’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실질적 권리를 판단하게 된다면 그 근거는 상표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데 어느 정도의 기여를 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한 사례”라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상표권이 명의신탁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명시적인 대법원 판단이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김철호 변호사(사법연수원 28기)는 “랜드마크가 될만한 판결”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상당수 대기업이 이런 문제가 있다”며 “앞으로 대기업 집단 분화 과정에서 유사한 분쟁이 많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 판결이 ‘리딩 케이스’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