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이어진 협력 관계는 한쪽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끝이 나고 말았다.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1차 협력사 톱텍의 이야기다. 지식경제부 장관상, 삼성전자 선정 강소기업상, 대통령 산업포장, 수출 8억불 달성 포상 등 여러 상을 수상하며 국내 유망 중소기업으로 자리매김했던 톱텍은 삼성디스플레이의 국가 핵심 기술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2018년 검찰의 수사를 받았고, 이를 계기로 25년 동안 이어졌던 두 회사의 협력 관계는 막을 내렸다.

1심에서는 톱텍에 무죄가 선고됐지만, 2심에서는 결과가 뒤바뀌며 유죄 판결이 나왔다. 대표이사 등 임원이 구속기소되면서 톱텍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하마터면 국가 핵심 기술이 중국에 유출될뻔한 위험을 막은 것은 바로 검찰의 체계적인 수사력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하려던 기술 유출, 광고 때문에 발각돼

톱텍이 삼성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삼성전관(현 삼성SDI)에 브라운관 TV 자동화 설비를 납품하면서 톱텍은 이때 삼성과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이후 2014년 1월 삼성디스플레이 엣지 패널(스마트폰 한쪽 면이 구부러진 ‘엣지 디스플레이’)의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제조업체로 선정됐고, 엣지 패널이 담긴 갤럭시 엣지부터 노트9까지 시리즈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톱텍은 2016년 매출 3926억원에서 2017년 1조1384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폭발적인 상승세를 기록했다. 삼성 역시 2017년 매출 1조원을 달성하며 ‘디스 플레이 신화’를 창조했다.

하지만 둘의 성공적인 ‘윈윈(win-win)’ 관계는 2018년 막을 내렸다. 한창 수직 곡선을 그리다 그 무렵부터 매출이 줄어들기 시작한 톱텍은 삼성 디스플레이 측에 중국에 자신들의 기술력을 수출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삼성의 답변은 “안 된다”였다. 톱텍은 삼성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를 구현한 것인만큼 톱텍이 중국에 설비를 수출하면 6년간 엔지니어 36명, 1500억원을 투자해 만든 삼성의 기술 유출도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수익 창출이 절실했던 톱텍은 ‘삼성 몰래’ 중국에 수출하는 길을 택했다. 톱텍 대표 A씨 등은 2018년 3월 자사 회의실에서 중국에 별도 법인을 설립하기로 모의했고, 이들의 계획은 속전속결로 현실화됐다. 제3자인 A씨 형수의 명의를 이용해 F사를 세웠고, 톱텍의 임원이 부사장으로 취임해 ‘우회 수출’ 업무를 총괄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들의 행보는 금세 업계에 소문이 났고, 불과 두 달 만인 2018년 5월 국가정보원 산업기술보호센터가 관련 첩보를 입수했다. 심증은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를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결정적 단서는 중국에서 나왔다. 중국 BOE사가 한국의 F사와 수주 계약을 체결했다는 내용을 공시한 것이다. 이를 발견한 국정원은 2018년 8월 이 사건을 검찰로 넘겼다.

톱텍 아산사업장 전경. /조선DB

◇본격 수출 직전에 검찰에 덜미 잡힌 톱텍

곧장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바로 난관에 봉착했다. F사의 등기부상 주소에 가보니 전혀 다른 회사가 있던 것이다. 톱텍과 전혀 관련 없는 회사였다. 장소가 정확하지 않으면 압수수색 영장도 나오지 않을뿐더러 계획도 세우기 어렵다.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유출범죄수사부 수사관들이 국정원 첩보를 토대로 ‘위장 간판’을 내걸며 숨겨둔 공장까지 찾아낸 끝에 2018년 9월 톱텍 본사와 원래 공장, 의심가는 회사들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설 수 있었다.

A씨 등 중요 피의자들의 가족·제3자 명의로 된 휴대전화와 개인 계정의 이메일도 압수됐다.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범행의 전모가 드러났다. 2018년 3월 회의부터, 톱텍 직원들이 중국 BOE사와 접촉한 내용, A씨가 지시한 내용, 직원들이 중국에 가 설비 세팅을 해준 사실 등이 확인됐다. 검찰 관계자는 과거 수사브리핑에서 “수사 등에 대비해 차명폰을 사용하고 사내 메일 대신 개인 이메일을 사용하며 조직·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이 무렵 톱텍은 핵심 제작 설비 16대를 이미 수출했고, 다른 설비들도 중국에서 제작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부산의 한 항구에 설비 일부가 수출 직전이라는 내용을 파악한 검찰은 곧장 부산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검찰은 컨테이너에 포장돼 선적을 앞둔 8대를 압수했다. 톱텍 공소장에 따르면 중국으로 넘어간 설비는 16대, 수출 예정인 설비 8대, 제작 중인 설비 12대 등 총 36대였다. 검찰은 톱텍이 155억원 상당의 이득을 취했다고 보고 A씨와 F사 부사장 등 3명을 구속기소, 공범 8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톱텍이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부산의 한 항구에 3D라미네이션 설비를 보관한 모습. /수원지검 제공

◇”대기업의 갑질” vs “우리만의 독자적 기술”

법정에 선 톱텍은 “삼성이 영업비밀이라고 특정한 정보는 이미 공개돼 동종업계에 알려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상당수 설비 기술 개발에 톱텍이 제안한 부분이 있는 만큼 삼성 디스플레이만의 독자적인 기술이 아니며, 톱텍은 공동 개발자이기 때문에 제작 설비를 판매한 것은 위법하지 않다고도 주장했다. 아울러 “삼성의 주장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심은 톱텍의 주장을 받아들여 A씨 등 1명에게 전면 무죄를 선고했다. 중국에 설비를 판매하는 게 기술유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1심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1심 재판부는 “영업비밀로 특정된 정보에 대해 삼성디스플레이가 보유자의 지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삼성디스플레이와 톱텍의 공동소유로 인정해도 설비 판매금지약정 등이 없는데 톱텍이 해당 정보로 설비를 제작하고 판매했다는 이유만으로는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이라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검찰은 항소심에서 재판 전략을 전면 수정했다. ‘삼성 디스플레이가 없었다면 톱텍이 중국에 수출하려던 설비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 집중한 것이다.

◇일일이 도면과 대조하며 적용 기술 대조한 검찰

엣지 디스플레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3D라미네이션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엣지 디스플레이처럼 휴대폰의 모서리가 부드럽게 휘려면 실리콘 PAD를 이용해 플렉시블 아몰레드 패널(Flexible AMOLED Panel)과 같은 연성재질의 부품을 휴대폰의 구부러지는 면에 붙여야 한다. 이때 기포나 주름을 막는 등 완벽한 형태로 붙이는 초정밀 접합기술이 3D라미네이션 기술이다. 삼성이 3D라미네이션 기술을 개발했고, 톱텍은 이를 구현하는 설비를 만들었다. 즉 삼성이 개발한 기술이 없었더라면 톱텍의 설비는 탄생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검찰은 이를 확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검찰이 톱텍에 “이 기술이 삼성의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거 아니냐”라고 물으면 피의자들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발뺌하기 일쑤였다. 검찰은 피해자 측에 피의자의 진술을 거듭 확인했고,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기술 도면 등을 보면서 피의자를 상대로 각 과정에서 삼성과 톱텍의 기술이 어떻게 쓰였는지 일일이 확인 대조를 했다. 전문 기술 지식이 있는 자문관에게 검토를 요청하는 등 기술적인 자문도 받았다.

한편으로는 3D라미네이션 기술이 삼성이 개발해 철저하게 보안에 부쳤던 기술이며, 삼성 디스플레이와 톱텍 사이 비밀유지계약서가 있었기 때문에 엣지 디스플레이가 두 업체의 공동 개발의 결과물이라 하더라도 기술을 유출한 톱텍을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심은 결국 이 같은 검찰 주장을 받아들였고, A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F사 부사장 등 주요 공범에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이 법조계에서 더 주목을 받는 것은 ‘공동개발한 사안이더라도 임의로 유출할 경우 형사처벌할 수 있다’는 최초 판례가 나왔기 때문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계약 또는 묵시적 합의로 영업비밀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중국업체에 이를 누설한 것은 위법하다”고 지적했다.

◇”범죄 확인 위해 설계도면과 설비파일, 설비까지 철저히 파헤친다”

항소심에서 유죄로 뒤집히면서 산업통상자원부가 고시한 ‘첨단기술’들이 보호됐지만, 최근 기술유출 범죄들의 동향이 바뀌어 우려도 커졌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과거 퇴직자들이 몰래 도면 등을 들고 나가 판매하며 범행이 이뤄졌다면 최근에는 대기업과 협력사 간 공동개발이 많아지면서 협력사들을 통한 유출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건 공판을 담당한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수사부 소속 박성현(변호사시험 3회) 검사는 15일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퇴직한 직원들이 기술을 몰래 가져 나와 내다 파는 시절은 끝났다”며 “상당히 고도화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이 자신들의 핵심 기술을 장비화하는 데 필요한 설비 제작을 맡기는 등 공동개발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누구의 기술이고, 어떤 기술이 유출됐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도 피의자들이 조사 과정에서 “검사님, 말씀하신 기술은 유출할 정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라고 진술했지만, 실제로 확인해보니 영업비밀에 해당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진술은 대다수 기술유출 사건에서 통상적으로 나온다고 한다.

박 검사는 “이 때문에 피의자들의 진술이 거짓인지를 확인하는 게 매우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피의자들의 그런 진술이 나오면 일일이 피해회사에 확인하거나 자문관들의 검토를 거친다. 또 압수한 자료들 중 설계도면과 설비 파일, 실제 설비를 비교해보는 등의 작업을 이어나가는 게 필수다. 실제로 다른 사건에서는 피해 회사의 조립 설명서에 오타까지 똑같이 돼 있던 사실을 발견해 유죄로 이어지기도 했다. 박 검사는 “피의자의 진술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하고 기술자료를 분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이 과정을 거치며 유죄의 증거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5일 수원지방검찰청 방위산업 산업기술 범죄수사부 박성현 검사가 우리나라 기업기술을 외국경쟁 업체로 유출시키는 위법행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이명원 기자

◇”최초 판례 리딩 케이스 될 것... 새 양형 기준도 기대”

아울러 박 검사는 새로운 양형기준에 대한 기대도 내비쳤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기술의 해외유출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새롭게 출범한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에 돌입했다. 박 검사는 “법정형은 ‘징역 3년 이상’, ‘징역 15년 이하’ 등 높게 설정돼 있지만, 실제 선고되는 형은 낮았다”며 “낮은 양형기준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술유출 범죄를 ‘음주운전’에 빗댔다. 그는 “기술유출 범죄는 양형기준이 높아지면서 발생이 줄어든 음주운전과 비슷한 성격이 있다”며 “예를 들어 100건이 벌어지지만 모두 적달돼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경찰을 제외하면 수원지검과 서울중앙·동부지검이 사실상 수사기관의 전부인데, 모두 적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양형기준이 높아져 범죄 시도 자체에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다는 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