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가 외국인 투자자들의 역대급 매도세에 발목 잡혔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은 최근 나흘 동안 코스피에서 20조원 넘게 순매도(매도가 매수보다 많은 것)했다. 같은 기간 국내 개인 투자자들이 '사자'를 외치며 19조5000억원을 순매수한 것과 반대 행보를 보인 셈이다. 증권가에서는 외국인이 단기 급등을 의식해 차익 실현에 나선 결과란 해석이 우세하지만 투자자들 사이에선 "이러다 개미들만 고점에 물리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도 커지는 분위기다.
◇외국인, 나흘간 20조 '매도 폭탄'
1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는 지난 12일 전날보다 2.29% 내린 7634.15에 거래를 마쳤다. 이날 코스피는 지난밤 미국 증시에서 반도체주(株)의 강세에 힘입어 1.68% 상승 출발했다. 개장 초에는 7999.67까지 오르며 '8000 고지'의 턱밑까지 왔다. 하지만 장중 외국인이 '팔자'에 나선 끝에 하루만에 5조6000억원 넘게 팔아치우면서 약세로 돌아섰다. 같은 날 개인은 6조6000억원을 순매수했다.
외국인은 이달 초까지만 해도 역대급 '사자'에 나섰다. 코스피가 사상 처음 7000선을 돌파한 지난 6일까지의 두 거래일 동안 6조원 넘게 순매수했다. 하지만 7일부터 갑작스레 '팔자'로 태세를 바꾸고는 네 거래일 동안 20조4000억원을 내던졌다. 코스피는 개인 매수세에 힘입어 연이어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지만 외국인들은 매도를 멈추지 않은 셈이다. 특히 이런 매도세가 국내외 증권가에서 코스피 전망치를 1만~1만2000으로 잇따라 높여 잡는 가운데 나왔다는 점이 투자자들의 불안을 키웠다.
◇"차익 실현을 위한 기계적 매매"
증권가에선 외국인 매도세가 차익 실현과 자산 포트폴리오 조정에 따른 기계적 매매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많다. 최근 한국 증시의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면서 '한국 반도체' 투자 비중이 빠르게 불어나자, 특정 섹터의 쏠림을 막기 위해 매도를 할 수밖에 없었단 취지다. 외국인 투자자는 사실상 해외 연기금·투자은행·증권사 등 기관이 대부분이다. 기관 투자자는 '북미 AI' '아시아 반도체' 등 지역과 업종 등 자체 분류에 따라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분화해 리스크를 줄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 과정에서 코스피에서 대규모 차익 실현이 발생했다는 해석이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외국인 매도는 한국 비중이 너무 늘어난 데 따른 비중 축소 리밸런싱"이라며 "미국 증시 시간 외 거래에서 샌디스크와 마이크론이 각각 3.6%, 3.1% 하락하면서 반도체 투자 심리가 위축된 측면도 있다"고 했다.
12일 미국의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 발표가 외국인들의 차익 실현을 부추겼다는 의견도 있다. 최근 이란 전쟁으로 유가가 급등한 탓에 미 CPI가 시장 예상치를 웃돌 것이란 예상이 많았는데, 물가 부담은 유동성 감소로 이어져 증시에 악재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날 미 노동부는 4월 CPI가 전년 동기 대비 3.8% 올라 시장 예상치(3.7%)를 상회했다고 밝히면서 미 S&P500과 나스닥은 각각 0.16%, 0.71% 하락 마감했다.
◇"실적 전망 달라진 건 없어, 더 간다"
해외 언론에서는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의 'AI(인공지능) 국민배당금' 언급 탓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김 실장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AI 산업 관련된 이익의 일부는 "구조적으로 국민에게 환원돼야 한다"고 적었다. 이를 두고 블룸버그는 "한국의 고위 정책 당국자가 AI 산업에서 발생한 세수를 활용해 국민에게 배당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 증시가 크게 출렁였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기업 이익을 정부가 나서서 재분배할 수 있단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투자 심리가 꺾였다는 것이다.
증권가에선 여전히 국내 증시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우세하다. 한지영 키움증권 연구원은 "실적과 밸류에이션 등 펀더멘털(기초체력) 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주가가 단기에 너무 급등하는 과정에서 포모(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가 심화했고, 이에 따른 차익 실현 욕구가 전쟁·CPI 등을 명분 삼아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그렇게 외국인들이 국내 주식을 팔았어도 오히려 외국인 코스피 보유 비율은 2006년 이후 최고치"라며 "외국인 리밸런싱 이후의 유동성 감소를 너무 우려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고 했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외국인 국내 증시 매도세가 환율 상승으로 이어지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은 만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실제로 지난 1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전날보다 17.5원 급등한 1489.9원에 마감했다. 민경원 우리은행 연구원은 "외국인 국내 증시 순매도가 이어지면서 원화 약세 부담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며 "수입업체 결제 수요 등 달러 실수요 매수세까지 더해지며 환율 상승 압력을 키울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