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 시대에 살아가는 지금, 전 세계 금리가 과거와 같은 저금리로 돌아가긴 어렵다는 전망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장부에 부채로 나타나지 않는 ‘숨은 부채’를 관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가계의 경우엔 부동산 대출 증가에 따른 부채 위험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고 했다.

자본시장연구원(자본연)은 22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금리 기조의 구조적 전환 가능성과 민간 부채’를 주제로 개원 26주년 기념 콘퍼런스를 열었다. 발표와 토론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글로벌 금리가 과거의 저금리 수준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작다고 진단했다.

강현주 자본연 선임연구위원은 “앞으로 미국 경제가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물가가 올라 주요 선진국의 국가 부채는 확대될 것”이라며 “이에 글로벌 금리는 과거와 같은 저금리 수준으로 돌아가긴 힘들다”고 전망했다.

강현주(서 있는 남성)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2023년 9월 22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금리 기조의 구조적 전환 가능성과 민간 부채’와 관련해 강연하고 있다. /강정아 기자

고금리 기조가 지속되며 자금 조달 금리 급등으로 기업의 도산·성장 둔화 우려가 커졌다는 진단도 나왔다. 다만 현금 유동성 위험이 고조돼 채무불이행이 발생하거나 부도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상호 자본연 연구위원은 “국내 기업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저금리 상황에서도 보수적으로 부채 관리를 해왔다”고 했다. 다소 높은 수준으로 금리가 오르더라도 부채가 일정한 복원력을 유지할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빚으로 지은 집(2014)’의 저자 아티프 미안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상장 기업의 부채 관리는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미안 교수는 “한국에 중요한 것은 경기 연착륙을 위한 부채 재조정”이라며 “기업 구조 조정 시 기업 파산 관련 규제 등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기업이 효율적으로 부채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업 수명주기에 기반해 재무구조와 주주환원 정책을 조정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기업의 도입기와 성장기엔 레버리지를 활발히 활용하되, 조정기와 쇠퇴기엔 부채를 줄이고 주주환원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2023년 9월 22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금리 기조의 구조적 전환 가능성과 민간 부채’를 주제로 패널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왼쪽부터 노원 삼정회계법인 전무, 박성진 국가회계재정통계센터 소장, 고승범 전 금융위원장, 박기영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이형주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 이재원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장. /강정아 기자

전문가들은 재무제표상 자본으로 계상된 신종자본증권과 부외부채 등 숨은 부채를 관리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부외부채는 회사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이른바 ‘보이지 않는 부채’를 의미한다. 탈탄소화를 위한 온실가스 감축, 좌초자산(더는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자산)을 대체하기 위한 투자 등이 포함된다.

노원 삼정회계법인 전무는 패널 토론 중 신종자본증권 발행이 늘어나면서 기업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했다. 신종자본증권은 채권과 자본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채권 만기 30년 이후에도 연장 가능한 조건으로 발행돼 회계 처리 시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인정된다. 보통 5년마다 조기상환(콜옵션)을 진행해 일정 부분을 갚는다. 노 전무는 “고금리가 지속되며 대기업을 중심으로 신종자본증권 발행이 급증했다”며 “5년 이후부터 조기 상환권을 행사하게 되면 유동성 금리는 더 높아져 기업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고 했다.

또 최근 탈탄소화를 위한 지속가능경영 공시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부외 부채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노 전무는 “국내 기업의 ‘RE100(사용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는 것) 선언이 이어지지만, 실제론 공시할 의무가 없어 어느 정도 비용이 드는지 알 수 없다”며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공시가 이뤄지면 관련 부채가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국내 경제 주요 위험 요인으로 급부상한 가계부채에 대한 의견도 나왔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8월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1075조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해 초부터 이어진 부동산 규제 완화로 대출 수요가 증가하며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이 급증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이에 전문가들은 부동산 관련 대출을 중심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정화영 자본연 연구위원은 “국내 가계는 실물자산 투자를 활발히 하고 금융자산은 낮은 수준으로 갖고 있어 예상치 못한 충격 발생 시 취약성이 높다”며 주요국에 비해 가계부채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증가 속도도 빠르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국내 가계가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것을 지나치게 기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정 연구위원은 “가계에서 주택 가격 상승을 기대하며 부동산에 투자할 의향이 높아져 가계부채가 더 확대될 수 있다”며 “가계 부실 위험이 더 커지지 않도록 대비하는 한편 부동산 자산 가격 상승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