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국내 금융사의 보안 시스템 투자가 "형편없는 수준"이라며 규제 강화를 위한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1일 말했다.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중단에 따른 '대출 절벽'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시장의 우려에 대해선 "대출 충격이나 절벽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 원장은 이날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를 열고 금융권 현안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이 원장은 최근 금융사 해킹 사고로 고객 개인정보나 자산 유출이 반복되는 데 대해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의 보안 시스템 투자는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찬진 금감원장이 1일 금감원에서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민국 기자

지난달 가상자산거래소 업비트에서 해킹으로 회원 자산 445억원이 외부로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지난 8월에도 롯데카드 회원 297만명의 개인 정보가 유출됐다. 최근 쿠팡에서도 3370만개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원장은 "보안이 뚫리면 회사가 망할 수 있는 위험한 수준이란 걸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며 "보안이 생존을 위한 것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자본시장법에 준하는 수준으로 규제를 강화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 원장은 다만 쿠팡의 고객 정보 유출에 대해선 "(금감원의) 규제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원장은 시중은행의 '대출 절벽' 현상이 내년까지는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원장은 "올 연말 시중은행 상당수가 대출 한도 가이드라인을 넘어선 부분이 확인됐다"며 "그러나 이 문제가 내년도에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대출과 관련된 충격이나 절벽이 발생할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금융위원회와 공조해 대출 절벽 우려가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 원장은 금융지주사 회장들에 대해 "다들 연임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 같다"며 "특정 경영인이 연임을 위해 측근으로 이사회를 구성하거나, 임원추천위원회 진행 시 고의적으로 자신보다 경쟁력 없는 후보를 세우는지를 감시하겠다"고 했다. 금감원은 금융지주 감독 제도 개선을 위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할 계획이다.

은행권의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 판매에 대해서는 사후 구제 노력에 따라 제재가 완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최근 금감원은 KB국민·신한·하나·NH농협·SC제일 등 홍콩 ELS 판매 은행 5곳에 대해 2조원 규모 과징금을 사전 통보했다.

금융감독원. /뉴스1

이 원장은 내년부터 삼성생명(032830) 국제회계기준(IFRS17) 예외 적용을 중단할 방침이라고 했다. 최근 삼성생명은 투자 이익 일부를 유배당 보험 가입자에게 배당하지 않고, '계약자지분조정'이라는 별도 부채 항목으로 표기해 '일탈 회계' 비판을 받았다. 이 원장은 최근 비급여 과잉 진료로 보험사 적자를 유발하는 실손 의료보험 구조 개혁을 위해 보건복지부와 협력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 원장은 빅테크가 금융 산업에 진출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없는지 살피겠다고도 했다. 최근 네이버파이낸셜과 두나무가 합병한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이 원장은 "빅테크가 금융 시장에 진출했을 때 파괴력,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한 안전장치가 마련돼 있는지 살필 계획"이라고 했다.

이 원장은 내년 1월 10일 전후 마무리를 목표로 조직 개편과 인사를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임원·부서장 인사 검증을 진행 중이며,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며 "신설된 조직도 있고 새로운 국정 과제가 부여된 영역도 있어, 이런 사안을 전반적으로 반영한 개편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조직 개편을 통해 금융 상품 설계 단계부터 금융사를 감독해 소비자 보호 기능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이 원장은 "사전 예방 성격의 소비자 보호를 하자는 방향성을 가지고 조직을 개편하고 있다"며 "현재 금감원의 소비자 보호 기능은 사고가 발생한 후 구제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번 개편으로 상품 설계 하자에 대한 금융사의 책임 문제도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금감원 내 특별사법경찰(특사경)에 대한 권한 확대의 필요성도 주장했다. 금감원은 현재 주가조작 특사경에 이어 민생금융범죄 특사경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보이스피싱, 보험사기, 불법 사금융 등을 직접 대응하기 위해서다. 이 원장은 "금감원 내 특사경은 강제 조사권이나 인지 수사권 등이 없다"며 "이 때문에 특정 사안에 대한 수사에 나설 때 2주 이상 걸리며, 그 사이에 증거가 인멸되는 문제 등이 있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이어 "이번에 민생 금융범죄 특사경이 설립되더라도 이 같은 이유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매우 안타까워하실 것"이라며 "관련 문제들이 개선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