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연금(368조원) 시장의 87%를 차지하는 연금보험·연금저축보험의 저조한 수익률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톤틴연금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톤틴연금은 가입자가 사망할 경우 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적게 지급하는 대신, 이 재원을 생존한 다른 가입자에게 돌려줘 더 많은 연금을 받게 하는 상품이다. 국내에서는 저해지 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31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김철주 생명보험협회장은 지난 3월 취임 100일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저해지 환급형 연금상품을 활성화하겠다고 했다. 저해지 환급형은 보험 계약을 중도 해지할 경우 해지환급금을 적게 지급하는 상품을 의미한다. 업계에선 ‘한국형 톤틴연금’으로 불린다. 금융위원회가 2022년 11월 연금보험의 해지환급금 규모를 원금보다 낮게 설정할 수 있도록 하는 중도환급률 규제를 완화하면서 상품 개발의 길이 열렸다.
톤틴연금은 17세기 은행가 로렌조 톤티가 고안한 상품이다. 연금 가입자가 사망할 경우 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그가 냈던 보험료와 적립금을 다른 가입자의 연금 재원으로 활용한다. 조기 사망하면 한푼도 받지 못하고, 최후까지 생존한 사람이 모든 연금액을 독차지하는 구조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톤틴연금은 1900년대 미국 전체 보험시장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미국 전체 가구 수는 1800만개였는데, 가입된 톤틴연금만 900만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사망자가 많아질수록 경제적 이득이 높아진다는 점 때문에 도덕적 문제는 계속됐다. 더구나 미국 보험사들이 톤틴연금으로 조성된 기금을 횡령하는 등 법적 문제가 불거졌고, 미국 뉴욕주는 1906년 톤틴연금을 금지하기로 했다.
시장서 퇴출당한 톤틴연금이 최근 다시 떠오르는 이유는 장수 리스크 때문이다. 의학기술 발달로 90~100세까지 생존하는 환경이 조성됐는데, 기존 연금 상품으로는 소득 공백을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 생존하면 할수록 더 많은 연금액을 가져가는 톤틴연금이 대안으로 꼽히는 것이다.
일본은 2016년부터 톤틴연금을 도입해 판매하고 있다. 50세에 가입해 매월 4만~5만엔을 내면 매년 60만엔을 연금으로 돌려받는 방식이다. 90세 이전에 사망하면 손실이 발생하지만, 100세까지 생존하면 낸 보험료의 150~170%를 연금으로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국내에서는 저해지 환급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표적으로 연 단리 8%의 확정이율을 제공하는 IBK연금보험 상품의 경우 20년 뒤 계약을 해지하면 환급률은 87.2%에 불과하다. 반면 같은 기간 계약을 유지하면 연금적립률은 220%에 달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것이다.
문제는 보험 계약을 해지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입자들은 고물가·고금리 등으로 보험료를 납부하기 힘들 때 계약을 해지한다. 경기 침체를 버티지 못한 서민은 더 많은 손해를 보고, 계약을 유지할 여력이 되는 가입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공개된 생명보험사의 5년차 계약 유지율은 40%에 불과했다. 10명 중 6명이 보험 계약 후 5년 내 계약을 해지한다는 뜻이다. 연금 상품만 판매하는 IBK연금보험의 계약유지율은 52.6%였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침체된 연금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연금액을 늘리는 방안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보니 톤틴연금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며 “톤틴연금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중도 해지 시 해약환급금이 적을 수 있다는 것을 계약자가 잘 인지하고 가입했느냐 여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