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기업과 주주행동주의 상생·발전을 위한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그는 당시 대통령실 이동 여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해해 달라"며 즉답을 피했다. /뉴스1

최근 대통령실 수석비서관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소문에 휩싸였던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23일 내부 회의에서 올해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현안을 계속 챙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자신의 거취를 두고 한동안 말을 아꼈던 그가 명확하게 잔류 의지를 보이자, 금융 시장에서는 이 원장의 대통령실 이동이 사실상 무산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24일 금감원 관계자에 따르면 이 원장은 전날 오전 가진 임원 회의에서 “올해 3~4분까지 할 일이 많다”면서 “동요하지 말고 각자 업무에 집중하라”고 당부했다. 검사 출신인 이 원장은 또 지금껏 밝혔던 것처럼 사정기관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권과 금융 시장에서는 지난 10일 총선 이후 이 원장이 대통령실로 자리를 옮길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많았다. 현 정부가 출범한 2022년 5월부터 지금껏 자리를 지켜온 데다, 윤 대통령이 가장 아끼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혔기 때문이다. 최근 신설이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진 법률수석비서관 자리가 그의 다음 행선지로 거론됐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계속 말을 아껴 왔다. 그는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기업과 주주행동주의의 상생·발전을 위한 간담회’를 마친 후 대통령실 합류 여부 등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오늘은 자본 시장과 관련한 좋은 말씀을 듣는 자리다. 이해해 달라”면서 즉답을 피했다.

이 원장은 총선 직후 진행된 금감원 임원 회의와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들과의 오찬, 금융위원회 정례 회의 등 중요한 자리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그의 대통령실 이동이 임박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지만, 이 원장은 불참 배경에 대해서도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전날 이 원장이 보름간의 침묵을 깨고 금감원에 계속 남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원장의 행선지로 거론되는 법률수석 자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 지가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폐지된 민정수석을 대신해 국민 여론을 청취하고 정책을 조율하는 업무를 맡는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대통령이 검찰을 포함한 주요 사정기관을 장악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이 경우 법률수석은 악화된 여론과 야당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을 신임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며 국민의 지지를 다시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윤 대통령에게도 이 원장의 법률수석 기용은 부담이 큰 선택이다. 이 때문에 악역이 되기를 원치 않는 이 원장의 속내와 여론 악화를 우려한 정부의 뜻이 맞아떨어지면서, 보직 이동이 사실상 무산되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정치권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실은 최근 법률수석 후보로 이 원장 대신 윤 대통령과 가까운 다른 검찰 출신 인사들로 눈을 돌린 것으로 전해졌다.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으로 일하던 시절 대검 공공수사부장으로 옆을 지켰던 박찬호 전 검사장 등이 새로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금융 시장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점도 이 원장이 잔류 의지를 밝힌 이유로 꼽힌다. 특히 지난해부터 저축은행과 캐피탈 등 2금융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규모가 급증한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가까스로 틀어막았던 부동산 PF 위기가 올해 안에 다시 불거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최근 금융 시장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틀어 막았던 부동산 PF 부실 문제가 올해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사진은 워크아웃이 진행 중인 태영건설 본사의 로비 모습. /연합뉴스

최근 이란과 이스라엘의 군사 분쟁으로 외환 시장도 불안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또 윤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정착시키는 일도 금감원이 해야 할 주요 과제 중 하나다.

섣불리 금감원장을 교체할 경우 정책의 집중도가 떨어지고, 후임 원장이 현안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산적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상생금융 활성화, 공매도 금지 등 지금껏 윤 대통령의 주문을 충실히 이행해 온 이 원장에게 계속 업무를 맡기는 게 훨씬 안전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 원장의 전날 발언이 어수선한 내부 분위기를 다잡는 차원일 뿐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정치권 관계자는 “인사는 국정 쇄신의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카드다”라면서 “2년간 자리를 떠나지 않은 이 원장의 보직 교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