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사. /뉴스1

우리은행이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손실에 대해 선제적으로 배상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ELS 판매 규모가 은행권에서 가장 작아 배상 부담이 크지 않기 때문에 신속한 결정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융 당국의 압박에도 배임 우려에 선뜻 자율 배상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다른 은행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20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오는 22일 열리는 이사회에서 홍콩H지수 ELS 자율 배상에 관한 안건을 부의할 예정이다. 우리은행은 증권가 분석 등을 참고해 총 배상액 규모를 최대 100억원으로 산정했다. 우리은행의 홍콩 H지수 ELS 판매 잔액은 총 413억원으로 전날 기준 손실률이 45%인 점을 감안해 역산하면, 평균 배상비율은 54%다. 실제 배상액은 100억원을 밑돌 것으로 보이는데, 평균 배상비율은 40%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홍콩H지수 ELS에 3억원을 넣은 투자자가 1억3500만원(손실률 45%)의 손실을 봤다고 가정할 경우, 평균 배상비율 40%를 적용하면 5400만원을 배상받는 셈이다.

금감원이 지난 11일 발표한 홍콩 H지수 ELS 자율 배상안에 따르면 시중은행의 실질적인 배상 비율은 최대 50%다. 적합성 원칙 및 설명의무 위반, 부당권유 여부에 따른 ‘기본 배상 비율’ 20~40%에 불완전판매를 유발한 내부통제 부실 책임에 따른 은행 ‘가중 비율’ 10%를 더한 수치다.

다른 은행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자율 배상으로 인한 배임 우려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은행이 선제적으로 자율 배상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히며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은 ‘마지노선’을 제시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 18일 기자들과 만나 “이번 주와 다음 주 각 은행의 이사회와 주주총회가 있기 때문에 절차를 걸쳐 각 사의 입장이 나올 것으로 본다”며 이달 내로 입장을 정리할 것을 주문했다. 이날 하나은행을 시작으로 21일 신한·KB국민은행, 28일 NH농협은행, 29일 SC제일은행의 정기 이사회가 잇따라 열리지만, 자율 배상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시중 은행 관계자는 “배상액 산정 작업이 아직 진행 중이다”라며 “추후 임시 이사회를 열어 보고할 계획이다”라고 했다.

우리은행이 예상보다 높은 수준의 평균 배상 비율을 적용해 배상액을 산정한 것도 부담이다. 증권가에서는 평균 배상 비율을 30%대 중후반으로 추산하고 있다. 기본 배상 비율의 중간값(25%)에 내부통제 부실로 인한 은행 가중값(10%)을 더한 수치다. 한화투자증권은 최근 발간한 리포트에서 평균 손실 배상 비율을 34~37%로 추정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평균 배상 비율을 40~50%로 잡았다는 건 불완전판매를 자인하는 셈이다. 주주들이 경영진을 상대로 배임 소송을 제기할 여지가 크다”며 “우리은행이 이렇게 치고 나가면 나머지 은행은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배상액 100억원은 최대치일 뿐, 실제 배상 비율은 다를 수 있다”고 했다. 배임과 관련해선 우리은행 경영진과 이사회가 자율 배상을 결정하더라도 배임 혐의를 받을 소지가 없다는 1차 법률 검토를 마쳤다고 했다.

그래픽=정서희

올해 상반기 만기가 도래하는 홍콩H지수 ELS 물량을 기준으로 은행별 예상 손실 배상액(투자자 손실률 50%, 손실 배상비율 40% 가정)을 산정해 보면, KB국민은행이 9489억원으로 가장 많다. 이어 신한은행(2666억원), NH농협은행(1476억원), 하나은행(1466억원), SC제일은행(1237억원), 우리은행(73억원) 순이다. 올해 하반기부터 만기가 도래하는 홍콩H지수 ELS에서 발생한 손실분에 대한 배상액까지 더할 경우 국민은행은 1조원 이상을 배상에 써야 한다. 증권가에선 홍콩H지수가 반등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올해 하반기 ELS 손실률이 20% 안팎일 것으로 전망한다.

배상 규모가 상당한 만큼 이사회를 설득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올해 실적이 큰 폭으로 줄어들면 주주 배당액 감소가 불가피하고, 이는 곧 ‘최고경영자(CEO) 관리 소홀, 이사회 방관’ 등 배임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은행을 제외한 대다수의 은행들은 다음 달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의 결과를 보고 배상 규모를 결정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금융 당국이 기한을 명시했지만 분조위 결과를 보고 자율 배상안을 만드는 것이 배임 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며 “당장 이달 안에 입장 표명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