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에 대한 비용이 고객에게 청구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입니다. 예전에는 추상적인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통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 위험비용이 증가한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계 2위 재보험사 스위스리(Swiss Re) 그룹의 크리스티안 무멘탈러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9일(현지시각)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지난해 급증한 이상기후 현상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가 늘어날수록 보험사의 손해율이 증가하고, 이는 결국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져 고객의 부담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홍수·화재가 증가할 것이다”며 보험사가 자연재해와 관련한 보험 가입을 받아들일 것인지(Insurability)보단,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는 능력(Affordability)이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가 미국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피해가 커지자 미국 보험사들은 보험료 인상 또는 상품 판매 중단으로 대처했다. 이들은 기후변화로 주택보험뿐만 아니라 건강보험 손해율까지 높아질 것으로 보고 보험료를 재평가하는 등 대비에 나서고 있다. 한국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24일 세계기상기구에 따르면,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로 발생한 경제적 손실 규모는 1970년대 175억달러에서 2010년대 1381억달러로 약 8배 증가했다. 기후변화로 경제적 손실이 커질수록 보험사는 불안에 떤다. 피해를 보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2022년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로 인한 전 세계 피해액은 2750억달러인데, 절반 수준인 1300억달러를 보험사가 부담했다. 보험사가 감당해야 할 손해액은 연 평균 5~7%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지난해 관측 사상 가장 뜨거운 여름이 이어지는 등 이상기후 현상이 두드러지며 보험사의 손해율이 급증했다. 캐나다에서 발생한 산불은 지난해 4월 시작돼 6개월 이상 꺼지지 않고 산림 15만6000㎢를 삼켰다. 지난해 5월 이탈리아에선 연평균 강우량의 절반인 500㎜가 이틀 만에 쏟아져 97억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
자연재해 피해가 증가하자 보험사들은 보험료 인상에 나섰다. 크리스티안이 언급한 것처럼 기후변화에 대한 위험비용이 고객에게 청구된 것이다. 미국 손해보험사 올스테이트는 뉴욕 당국에 자동차 보험료를 15%, 캘리포니아 당국에는 40% 각각 인상해달라고 요구했다. 파머스 인슈어런스 그룹은 일리노이와 텍사스에 거주하는 보험 가입자를 대상으로 주택화재 보험료를 23% 인상했다. 네이션와이드 뮤추얼은 노스캐롤라이나의 허리케인 피해 지역에 위치한 사람에 대한 주택·화재보험 갱신을 거부했다.
미국 보험업계는 기후변화가 자동차·주택보험 외 건강보험의 손해율도 높일 것으로 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4일 캘리포니아 지역의 폭염·산불로 심폐질환 환자가 많이 발생한다는 샌디에이고 대학 연구진의 논문을 인용, 건강보험이 더 비싸지고 가입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도 심각하진 않지만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태풍·호우·강풍·대설·지진 등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는 풍수해보험은 지자체가 보험료의 70%를 부담하고 있음에도 보험료는 2020년 1인당 평균 43만원에서 2022년 52만원으로 올랐다.
이현복 전주대 금융보험학과 교수팀이 지난해 보험학회지에 투고한 연구논문을 살펴보면, 국내 평균기온·열대야·폭염일수 등은 보험금 지급액과 ‘양의 인과성’이 있다. 기후변화로 평균온도가 올라갈수록 보험사가 보험금을 더 많이 지급한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로 보험료가 인상될 경우 이를 감당하지 못할 저소득층은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소득에 따라 받는 피해도 달라지는 ‘기후불평등’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손해율이 늘어나면 보험료는 당연히 인상된다”며 “실손보험료가 부담돼 가입하지 못하는 사람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보험료가 인상되면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