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최고경영자(CEO) 책임 부과’에 ‘자율배상안’ 카드까지 꺼내며 금융권 길들이기에 나섰다. 금융업계 안팎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의 금융사 버전이냐’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 일단 급한 대로 대책 마련에 나서고는 있지만, 선제적 자율배상안 마련에 대해서는 고개를 내젓는 분위기다. 자칫 배임 문제로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금감원에서 열린 2024년도 금융감독원 업무계획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모두 발언하고 있다. / 뉴스1

15일 정부와 금융권에 따르면, 오는 7월 3일부터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하 지배구조법)’ 개정안이 시행된다. 해당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금융회사는 법 시행 후 6개월 이내(2025년 1월)에 책무구조도를 제출해야 한다. 금융회사 중 은행과 금융지주사는 우선 적용 대상이다.

책무구조도에는 금융사 임원 개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내부통제 대상 업무의 범위와 내용을 기술한 ‘책무기술서’와 임원의 직책별 책무를 도식화한 ‘책무체계도’ 등이 포함된다. 금융회사 개별 특성을 반영해야 하고, 특정 임원에게 책무가 편중돼선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내부통제 책임을, 사안에 따라 CEO에게까지 묻겠다는 취지다.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 5일 “그릇된 결정을 내리거나 금융기관으로서의 당연한 책임을 회피하는 회사에 대해서는 시장에서의 퇴출도 불사하겠다는 원칙하에 단호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금융지주사를 비롯한 은행권은 발 빠르게 책무구조도를 마련에 나섰다. 다만 결국 CEO 징계를 위한 책무구조도 도입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드러낸다. 한 금융지주사 관계자는 “중대재해처벌법과 마찬가지로 모든 금융사고를 CEO가 책임져야 한다면 영업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이 경우 누가 CEO를 하려고 하겠나”라고 말했다.

◇ 금감원, ELS 사태 자율배상 요구…”불완전판매 인정하라고?”

업계에서는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사태와 겹쳐 금융당국이 전방위적 금융권 때리기에 나선 것이라 해석한다. 현재 금감원은 홍콩H지수 ELS 관련, 불완전판매 사례 확인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금융소비자법상 ‘설명의무 위반’과 ‘부당권유’에 해당하면, 각각 1억원 이하의 과태료뿐 아니라 상품 수입(투자액)의 50%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이달 말까지 홍콩H지수 ELS 손실에 대한 배상안 규모를 확정한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금융사가 선제적으로 자율배상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복현 원장은 “불법과 합법을 떠나 금융권 자체적인 자율배상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최소 50%로라도 먼저 배상을 진행하는 것이 소비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배상 규모가 일부 차이가 있더라도 금융사들이 자발적으로 일부를 배상해 주면 소비자 입장에서 유동성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ELS 불완전판매 여부가 확정되기 전에 자율배상안을 마련하는 건 무리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자율배상을 시행하면 금융회사가 설명의무 위반에 따른 불완전판매 책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자율배상안은 은행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잘못한 게 있으면 징계할 건데, 그전에 배상부터 하라’는 건 다분히 총선용”이라고 격앙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불완전판매에 대한 결론이 나오더라도 소송까지 가봐야 한다”며 “배임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당국에서 요구해도 바로 배상안을 마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IT조선 김경아 기자 kimka@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