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비트코인 현물 ETF에 대한 국내 투자와 발행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가상자산 거래소 가격 현황판을 배경으로 한 금융위원회의 홈페이지. /뉴스1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두고 국내 금융 당국의 안이한 대처와 완고한 규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당국이 비트코인 현물 ETF 투자와 국내 자산운용사의 발행을 모두 금지하면서, 새로운 자산에 대한 국내 소비자들의 투자 기회가 막히고, 가상자산 시장의 주도권마저 내주게 됐다는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비트코인 현물 ETF의 상장 신청서를 받은 후 8개월간 검토한 끝에 승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국내 금융 당국은 이 기간에 충분한 검토 없이 시간만 보내다, 미국의 승인 소식이 나온 후에야 부랴부랴 비트코인 선물 ETF의 투자는 허용하되, 현물 ETF 투자는 금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투자 커뮤니티와 금융투자업계, 정치권 등에서는 “금융 당국이 가상자산을 여전히 투기성 자산으로만 보는 시대착오적 인식에 갇혀 있다”는 비난이 늘고 있다. 또 가상자산에 대한 규제를 풀어 젊은 세대에게 도약의 기회를 주고, 금융의 선진화와 국제화를 꾀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기조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온다.

◇ 美, 2년간 장고…국내 금융 당국은 뒷짐만

미 SEC는 지난 10일(현지시각) 아크인베스트와 블랙록, 피델리티 등 11곳의 운용사가 제출한 비트코인 현물 ETF의 상장 신청을 승인했다. 지난해 5월 15일 아크인베스트가 제출한 신청서를 받은 후 약 8개월에 걸쳐 금융 시장에 미칠 영향 등을 여러모로 검토한 끝에 최종 승인 결정을 내렸다.

길게는 SEC와 그레이스케일의 소송전이 시작된 2021년부터 2년여간, 짧게는 아크인베스트가 신청서를 접수한 지난해 5월부터 8개월의 시간이 있었지만, 국내 금융 당국은 비트코인 현물 ETF에 대해 별다른 검토나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국내 금융 당국은 지난 11일 SEC의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소식이 나온 후에야 서둘러 대응에 나섰지만, 오히려 큰 혼란만 불렀다. 증권사들은 이날부터 미국 비트코인 현물 ETF의 거래를 중개할 예정이었는데, 금융위가 뒤늦게 자본시장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막고 나선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이날 오후 5시가 넘어서야 판매 중지 명령을 내렸고, 증권사들은 판매 공지를 내리고 전산 거래를 막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혼란은 주말까지 계속됐다. 그동안 금융위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던 탓에 일선 증권사들은 물론 투자자들도 어떤 비트코인 관련 투자 상품이 거래가 허용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결국 금융위는 14일이 돼서야 “해외에 상장된 비트코인 선물 ETF의 거래는 가능하지만, 현물 ETF는 국내 운용사의 발행과 해외 상품의 중개 모두 위법 소지가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 첫날 거래액만 6조원…新시장 주도권 내줄 판

금융 당국의 늦장 대응으로 큰 성장이 예상되는 가상자산 관련 상품 시장의 주도권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는 미국의 비트코인 ETF 상장 승인에 따라 대규모 신규 투자 자금이 유입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지금껏 비트코인은 가상자산 거래소에서만 매매가 됐기 때문에 위험성이 커 자금이 들어오기 어려웠는데, 앞으로 금융 당국의 승인을 받은 제도권 금융사의 투자 상품이 돼 주식 시장에서 거래가 되면 기관 투자자의 참여가 크게 늘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영국 금융사인 스탠다드차타드(SC)는 지난 8일 보고서를 통해 비트코인 현물 ETF에 올해만 최대 1000억달러(약 132조원)가 유입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실제로 거래 첫날인 지난 11일 뉴욕 증시에서 비트코인 현물 ETF는 46억달러(약 6조500억원)에 이르는 거래량을 기록하며, 전문가들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지난 12일 서울 서초구 빗썸 고객센터에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 시세 현황이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당국의 주장대로 자본시장법 개정이 필요하다면, 빨라도 6개월 넘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관측된다. 오는 4월 총선을 거친 후 일정 기간이 지나야 국회 상임위원회가 구성된다. 비트코인 현물 ETF에 대해 여야가 입장을 조율하고 금융 당국과의 업무 협의, 각종 공청회 등을 진행하는데 또 수개월이 소요될 수도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법 개정을 놓고 시간을 끄는 동안 미국은 더 많은 운용사가 다양한 비트코인 현물 ETF 상품을 쏟아내, 제도권 금융으로 들어온 가상자산 관련 상품 시장을 선점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국내 운용사는 해외로… “시대착오적” 비판

금융 당국이 비트코인 ETF에 대해 지금껏 무관심한 입장을 보이자, 국내 운용사들은 발행이 허용되는 국가로 이미 발길을 돌린 상태다. 삼성자산운용은 지난해 홍콩증권거래소에 비트코인 선물 액티브 ETF를 상장해 1년간 100% 넘는 수익률을 기록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도 미국 자회사인 글로벌X를 통해 지난해 8월 SEC에 비트코인 현물 ETF의 상장을 신청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금융투자업계는 국내에서 비트코인 현물 ETF 발행의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미국의 시장 규모가 빠르게 커질 경우 더 많은 운용사가 해외로 눈을 돌릴 것으로 전망한다.

금융 당국의 늦장 대응과 일관된 규제 방침에 대해 가상자산업계와 법조계, 정치권 등에서도 비판이 늘고 있다. 여당 일각에서도 비트코인 현물 ETF의 거래·발행은 시대적 흐름이라며, 금융위의 판단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 디지털자산 민관합동 태스크포스(TF)의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주현철 법무법인 이제 변호사는 “한국은 비트코인 거래량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가상자산 시장을 주도해 왔는데, 당국의 해묵은 규제로 금융이 성장할 기회를 스스로 놓치게 됐다”고 말했다. 주 변호사는 “세계에서 투자자 보호나 금융 범죄 예방에 가장 엄격한 미국이 승인한 상품을 한국이 가로막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다”라며 “이는 금융의 선진화, 세계화와 가상자산 규제 완화 등을 표방한 현 정부의 기조와도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