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은현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의료비 일부를 환급받은 실손보험 가입자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 보험사가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환급금을 보험사에 돌려줘야 한다는 소송을 제기하고 있어서다. 보험사들은 고객이 의료비를 환급받으면, 공단이 치료비를 부담한 것이 돼 고객에게 지급된 보험금 중 환급금 액수만큼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한 법원 판결도 엇갈리고 있다.

2004년 7월부터 시행된 ‘의료비 본인부담금 상한제’는 취약계층의 과다한 의료비 지출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지출한 의료비가 일정 수준을 넘을 경우 초과액을 돌려주는 제도다. 소득 하위 20%인 1분위가 1년 동안 87만원이 넘는 의료비를 지출할 경우 초과액을 공단이 환급해 주는 방식이다.

◇ “환급금은 부당이득”이라며 소송 거는 보험사

28일 보험업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실손보험을 취급하는 보험사들은 본인부담금 상한제에 따라 의료비를 환급받은 고객에게 환급 액수만큼의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보험사들은 이미 보험금이 지급된 경우 고객에게 직접 연락하거나 내용증명을 보내는 방식으로 환급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를 거절할 경우 고객을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하는 상황이다.

보험사가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실손보험 약관이다. 약관상 보험금 지급 대상은 ‘고객이 실제 부담하는 의료비’인데, 공단이 고객에게 의료비를 돌려주면 공단이 부담한 비용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해당 금액만큼은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보험금과 환급금을 모두 받은 고객이라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경우여서 다시 보험사에 돌려줘야 한다는 논리다.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전경. /뉴스1

문제는 보험사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를 두고 법원 판결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 212단독 심학식 판사는 2009년 7월 KB손해보험의 실손보험에 가입한 A씨가 공단으로부터 환급받은 의료비 867만원을 보험사에 돌려줄 필요가 없다고 지난 9월 판결했다. 재판부는 “환급금은 경제적 취약계층에게 의료서비스 외 소비재를 추가로 소비할 수 있는 소득보전 성격의 금품”이라며 “환급금을 보험사가 취할 수 있게 해 경제적 이익을 보험사에 귀속시키는 것은 제도적 취지에 반한다”고 했다.

반면 같은 법원의 민사항소5부(한숙희 부장판사)는 2005년 8월 KB손해보험의 실손보험에 가입한 B씨가 공단으로부터 받은 458만원을 보험사에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보험계약은 B씨가 진료를 받음으로써 본인부담금을 지출하는 재산적 손실을 입게 될 경우 그 손실을 보전받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며 “환급금에 의해 B씨가 종국적으로 부담하는 부담금이 감소하게 됐다면, 감소분은 법률상 원인 없이 얻은 이익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 2009년 10월 표준약관 등장하자 소급 적용하는 보험사

보험사와 고객 사이에서 본인부담금 상한제 논란이 생긴 이유는 약관의 모호함 때문이다. 실손보험 약관의 ‘보장하지 않는 손해’ 항목에는 상한제에 따라 사후 환급받는 금액과 관련한 규정이 없었다. 보험사들은 ‘본인부담금만 보험금 지급 대상’이라는 조항을 근거로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해 왔지만, 약관에 명시적 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약관 조항을 고객에게 현저히 불리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는 판결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2009년 10월 이후 실손보험 표준약관이 만들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표준약관에 본인부담금 상한제에 따른 환급금은 보험금 지급 대상이 아니라는 내용의 문구가 신설됐기 때문이다. 2009년 10월 이후 실손보험에 가입한 고객들은 환급금을 보험사에 지급할 필요가 없다며 소송에 나섰지만, 법원은 약관에 명시적 규정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보험사 손을 들어준 판결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서울 종로지사. /조선DB

관련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지만, 소액 사건이라 구체적 판단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됐다. 법조계는 심리불속행 기각은 기속력이 있는 대법원 판례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지만, 보험사들은 이를 환급금을 돌려받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보험사들은 A씨와 B씨 사례처럼 2009년 10월 표준약관 탄생 이전에 가입한 고객에게까지 표준약관 조항을 소급 적용해 환급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면서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법조계에선 약관은 보험계약 체결 당시의 것이 적용돼야 하는 만큼 2009년 10월 이전 실손보험 가입자들은 환급금을 보험사에 줄 필요가 없다고 보고 있다. 한 보험 관련 전문 변호사는 “논란이 되는 것은 2009년 10월 이전에 가입한 고객들”이라며 “이 시점 이전 약관에는 명확한 명시가 없었던 점이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