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문화 콘텐츠 소비시장이에요. 재미없는 콘텐츠는 가차 없이 저버리지만 만듦새가 우수한 것엔 열광하잖아요. 그런데 콘텐츠 소비 수준은 높은 반면 제작 환경은 폐쇄적이에요.”
K-콘텐츠 투자 플랫폼 펀더풀을 운영하는 윤성욱(46) 대표이사는 “소수 기관 투자자만 존재하는 콘텐츠 투자 시장의 판도를 바꿔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윤 대표는 “열정적인 콘텐츠 제작업자들이 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느끼는 문턱을 낮춘다면 훨씬 더 좋은 K-콘텐츠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펀더풀은 영화·드라마·뮤지컬 등 문화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사업자와 투자자를 잇는 온라인 소액투자 중개업체다. 기존의 콘텐츠 제작 사전 투자는 금융사와 벤처캐피털(VC) 등 소수의 전문기관만 참여했다. 콘텐츠 사업자들이 펀더풀에 투자유치 제안하면 펀더풀은 온라인 플랫폼에 공모의 장을 연다. 기관 투자자는 물론 개인 소액 투자자들도 투자에 참여할 수 있다. 투자와 제작을 마치고 콘텐츠가 공개되면 투자 규모에 따라 수익금을 돌려주는 사업구조다.
윤 대표는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창업에 뛰어들었다. 펀더풀 창업 전 영화 제작·배급사와 금융사에서 문화 콘텐츠 투자 실무를 담당하던 그였다. 10년 넘게 금융권과 문화계에 두 발을 걸치고 일하다 보니 ‘역량 있는 국내 콘텐츠 사업자들이 자금 조달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는 문제의식이 그의 머릿속에 찼다. 이것이 시발점이 돼 그는 콘텐츠 투자의 문턱을 낮추는 사업을 고민하고 펀더풀을 세웠다.
지난 2019년 설립된 펀더풀은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 시즌2′를 첫 투자상품으로 내건 뒤 영화 ‘한산: 용의 출현’, ‘범죄도시3′ 등 인기작 투자 공모를 발 빠르게 유치하며 성과를 내고 있다. 올해 9월 기준 누적 청약금액은 160억원을 돌파했고 플랫폼 가입자 수도 10만명을 넘어섰다. 직원 20여명 규모의 작은 회사지만 온라인 소액공모 시장 전체 투자금의 37%가 펀더풀을 통해 풀렸을 만큼 빠르게 성장 중이다.
지난달 3일 서울 영등포구 펀더풀 사무실에서 만난 윤 대표는 시종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업 계기와 방향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모든 창업의 앞엔 결핍이 있다”며 “‘이것만 해결하면 더 나은 시장을 만들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창업까지 이어졌다”고 밝혔다. 그는 “기존 문화산업은 정보가 폐쇄적이고 문화산업에 적합한 가치 평가 시스템이 없어 소위 말하는 ‘술자리에서 이뤄지는 투자’가 횡행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단호하게 “펀더풀의 소액공모와 가치평가가 ‘깜깜이’ 투자를 막는 대안모델로 자리잡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존 문화 콘텐츠 투자 시장의 한계를 느끼고 창업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VC에서 일할 때 문화 콘텐츠 투자 업무를 맡았다. 당시 정보 비대칭이 컸는데 오로지 제작사가 제공하는 자료로만 투자를 심사해야 했다. 다른 기업 자료를 활용한 교차 검증 방법도 없었다. 10년이 흘러 2010년대 초반 IBK기업은행에서 일하면서 문화 콘텐츠 투자 업무를 맡았는데 상황은 비슷했다. 은행이 대출할 때도 담보나 차주(돈 빌리는 사람) 신용평가를 하는데 당시 문화산업 관련 기업 가치를 평가하는 체계가 미비했다. 문화산업에서 첫 번째 투자자(팔로잉 인베스트)에게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후발 투자자(팔로우 인베스트)들의 참여를 도울 수 있는 투명하게 공개된 시장이 없었다.”
—펀더풀의 사업 모델이 어떻게 투명한 정보가 유통되는 시장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지 궁금하다.
“펀더풀은 소액공모 투자중개 업체다. 소액공모는 말 그대로 공개적으로 투자 유치를 벌이기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 또한 공모가 계속돼 공개된 투자 정보가 쌓이면 투자자들이 이전 투자 정보를 참고해 새로운 투자 대상의 가치를 판단할 기준이 생긴다. 공개된 정보가 쌓여 더 많은 투자자와 해외 기관 투자자를 끌어모을 유인이 생기고 더 많은 정보가 쌓인다. 이러한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다. 펀더풀 창업 전부터 미국 등 해외 콘텐츠 사업자들은 이미 소액공모로 직접 자금을 조달하고는 했다.”
—앞서 금융권에 문화산업 관련 기업을 평가할 모델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펀더풀은 콘텐츠 제작사의 옥석을 가릴 자체 방법이 있는가.
“콘텐츠 공급자들의 평판조회, 프로젝트 지분구조 분석 등을 바탕으로 한 자체 평가 기준이 있다. 예를 들어 한 콘텐츠 유통사가 투자를 제안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해당 유통사가 확보한 프로젝트의 지분이 차마 10%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통사가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는지, 유통 마진만 얻으려는 프로젝트인지 등을 알 길이 없다. 그러한 투자 권유는 긍정적으로 보기 힘들다. 이외에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콘텐츠 가치평가모델과 기업은행에서 일하며 터득했던 평가 모델을 활용하기도 한다.”
—창업 이후 꾸준히 공모를 열고 있다. 수익률이 높았던 콘텐츠도 궁금하다.
“지난 2021년엔 콘텐츠 투자 상품 19개의 공모를 진행했다. 작년엔 24개 투자를 중개했다. 그리고 올해는 10월까지 31개 상품을 선보였다. 매년 다채로운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수익률이 높았던 콘텐츠는 2021년 서울에서 열린 ‘요시고(YOSIGO) 사진전’으로 수익률 145%를 기록했다. 가장 인기 있던 상품은 마동석 배우 주연 영화 ‘범죄도시3′로 1시간 만에 10억원이 쏟아졌다. 당시 우리 회사 서버가 느려질 정도로 많은 투자자가 몰렸다.”
—문화산업과 금융권 모두 발을 걸친 사업인 만큼 협업이 중요할 것 같다. 현재 협업 중인 주요 기업들을 소개한다면.
“영화의 경우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쇼박스, B.A 엔터테인먼트, 하이브미디어코프 등 국내 주요 제작·배급사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신작 라인업을 꾸준히 공급받고 있다. 전시의 경우 씨씨오씨, 미디어앤아트, 드라마는 지담 등 국내 대표 제작·기획사들과 협업해 분야를 넓혀가고 있다. 금융사도 한국투자증권, KB증권, 신한은행 등의 스타트업 프로그램에 선정돼 제휴를 맺고 다방면으로 협력하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띵스’라는 새로운 서비스를 선보였다.
“띵스는 영화나 드라마 등 제작에 사용되는 소품(굿즈)을 판매하는 서비스다. 미국과 영국의 영화 시장을 살펴보면 매출의 50%가 극장에서 나오면 굿즈 매출이 10%쯤 차지한다. 지적재산권(IP) 관련 라이선스 매출도 15~20%씩 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이후로 극장가를 찾는 발길이 끊기면서 부가 매출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가 팬들의 수요도 있고 제작사는 마케팅에 활용할 수 있는 굿즈 판매 전략을 세웠다. 최근에 영화 ‘귀공자’의 주연 배우인 김선호의 향수를 띵스에서 판매했는데 1분 만에 매진되는 등 띵스 서비스도 인기를 끌고 있다.”
—새롭게 구상하는 사업이 있다면.
“국내 콘텐츠에 투자했을 때 영화·드라마·뮤지컬·전시 등 항목별로 수익률이 다를 수밖에 없다. 펀더풀 입장에서는 개인 투자자들이 안정적인 이익을 거두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펀더풀이 직접 개인 투자자의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고 평균 수익률을 낼 수 있도록 돕는 펀드 제작을 검토 중이다.
궁극적으론 한국의 다양한 콘텐츠 사업자들을 유익한 투자 상품을 만들 때 펀더풀을 찾는, 문화 콘텐츠 정보의 허브로 발돋움하고 싶다. 어떤 사업자든 펀더풀에서 공모·사모·굿즈 판매 등 다양한 투자 자금 조달 옵션을 선택하고 그때그때 환경에 맞게 콘텐츠 사업 투자를 유치하는 건강한 플랫폼의 기능을 확장하고 싶다.”
☞윤성욱 펀더풀 대표는
▲한양대 경영학 학사 ▲쇼이스트 한국영화팀 ▲한화 문화 콘텐츠 사업팀 ▲엠벤처투자 CT본부 팀장 ▲IBK기업은행 문화 콘텐츠금융부 과장 ▲와디즈 투자사업실 C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