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보험협회가 차기 회장으로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 김철주 금융채권자조정위원회 위원장을 낙점했다. 최근 경제·금융부처 요직을 독점하며 화려한 전성시대를 달리고 있는 ‘모피아(옛 재무부와 마피아 합성어)’의 핵심 인물을 수장(首長)으로 내세워 정부, 금융 당국과 보다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보험업계의 속내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생보협은 지난 24일 회장후보추천위원회 회의를 열고 김철주 금융채권자조정위원회 위원장을 차기 회장 후보로 단독 추천했다. 김 회장 내정자는 다음 달 초 총회를 거치면 3년 임기의 생보협회장으로 취임한다. 생보협이 관료 출신을 회장으로 선임한 것은 2014년 퇴임한 김규복 전 회장 이후 10년 만이다.
김 내정자는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해 재정경제부 종합정책과장과 기재부 공공정책국장, 경제정책국장,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한 인물로 대표적 모피아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모피아란 옛 재무부의 영문 약칭인 ‘MOF(Ministry of Finance)’와 서구 범죄 단체인 ‘마피아(Mafia)’의 합성어다. 재무부, 재정경제부, 기획재정부로 이어지는 오랜 기간 마피아처럼 끈끈한 인간관계를 구성해 서로를 챙기는 모습을 보였던 경제관료 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지난 1990년대부터 지금껏 쓰이고 있다.
당초 차기 생보협회장으로는 성대규 신한라이프 전 사장과 윤진식 전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의원, 임승태 KDB생명 회장 등이 거론돼 왔다. 생보협이 세간의 예상을 깨고 김 내정자를 차기 회장으로 선임한 데 대해 보험업계에서는 그가 현 정부의 모피아 라인 주요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김 내정자는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과 서울대 82학번, 행시 29회 동기다. 최 수석은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후임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예상이 쏟아지고 있는 손병두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행시 33회 출신으로 김 내정자의 후배다. 세 사람 모두 현 정부의 모피아 라인 핵심으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최근 정부와 금융 당국은 연일 금융권을 겨냥해 상생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요 타깃은 올해 막대한 수익을 거둔 은행들이지만, 보험업계 역시 압박을 받고 있다. 예상대로 다음 달 인선이 이뤄지면 생보협회장의 행시 동기가 경제부총리, 후배가 금융위원장이 된다. 생명보험사들 입장에선 협회에 든든한 ‘방패막이’ 역할을 기대할 만한 상황이 되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손해보험협회 역시 다음 회장으로 모피아 핵심 라인을 선택할 것이라는 전망이 늘고 있다. 정희수 현 회장의 임기는 다음 달 22일 종료된다. 손보협은 지난 27일 회장후보추천위원회 첫 회의를 열었고 다음 달 5일 두번째 회의를 진행한다.
현재 손보협 차기 회장 후보로는 허경욱 전 기획재정부 차관과 유광열 SGI서울보증 사장, 이병래 한국공인회계사회 부회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손보업계에서는 이 가운데 유 사장의 낙점 가능성에 가장 많은 표가 쏠린다. 세 사람 모두 행시를 거친 관료 출신이지만, 유 사장이 최 수석과 서울대 82학번, 행시 29회 동기로 훨씬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손해보험사들 역시 올해 실적이 눈에 띄게 개선돼 상생 금융에 동참하라는 압박을 받는 상황이다. 특히 정치권 등에서는 자동차 보험을 비롯한 주요 상품의 보험료율을 낮출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만약 유 사장이 회장에 선임된다면 생보협회와 같이 정부, 금융 당국과 더 긴밀한 소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두 보험협회를 이끌고 있는 회장들은 모두 정치색이 강한 인사들이었다. 정희수 생보협회장의 경우 여당인 국민의힘의 전신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소속으로 3선 의원을 지낸 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일했던 정치인 출신이이다. 정지원 손보협회장은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 문재인 정부 관료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부산 출신 금융인 모임인 ‘부금회’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친문(親文)’ 인사로 분류됐다.
금융권 관계자는 “지난해 정권이 바뀐 후부터 보험업계에서는 두 협회가 정부, 금융 당국의 요구와 압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불만이 제기돼 왔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어떻게 재편될 지 예상이 어려운 정치권의 인물보다는, 현 정부 들어 경제와 금융 부처는 물론 금융지주사까지 장악하고 있는 경제관료 출신들이 더 확실한 카드라 판단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