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손해보험사가 보장금액 설정 시 산출 근거 없이 마케팅만을 목적으로 무분별한 판매 경쟁을 하고 있다. 눈앞 이익에만 급급한 상품 개발은 자제해야 한다. 사회 전반에 보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지 않도록 손해보험 업계의 자정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김범수 금융감독원 상품심사판매분석국장은 지난 2일 서울 영등포구 보험개벌원에서 각 손해보험사 관계자들과 함께 ‘장기상품부서장 회의’를 열고 이같이 말했다. 이날 회의는 일부 손해보험사가 독감 보험 한도를 100만원으로 높이는 등 경쟁에 나서자 금감원이 업계에 자제를 당부하는 자리였다. 회의에 참석했던 각 보험사 부서장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김 국장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보험업계 일각에선 금감원이 기자들까지 불러 모아 회의를 일부 공개한 것은 과도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 회의가 있기 이틀 전 금감원은 독감 보험 한도를 100만원으로 올린 한화손해보험(000370) 임원을 불러 면담을 하고 한도 증액에 우려의 뜻을 전했다. 비슷한 내용으로 손해보험사 임원 회의도 이미 진행된 상황이어서 보여주기식 아니냐는 비판까지 나왔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임원들을 모아 놓고 말로는 협의라고 하지만, 결국은 독감 보험을 없애던가 한도를 낮추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최근 금융 감독당국의 제재 행보에 보험업계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당국 업무가 관리·감독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수백개에 달하는 상품과 각 상품에 탑재된 특약 하나하나를 문제 삼으며 개입하는 것은 과하다는 주장이다.
9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금감원은 올해 들어 간호·간병보험의 입원일당과 운전자보험의 변호사선임비용, 응급실 특약 중 비응급 보장, 독감 보험, 어린이보험, 단기납 종신보험 등 여러 상품 판매에 제동을 걸었다. 대부분 가입금액이 과도해 과잉진료 등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거나, 출혈경쟁으로 재무건전성이 악화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한때 1회 26만원까지 치솟았던 간호·간병보험 입원일당은 다시 축소됐고, 비응급 보장 한도도 줄어들었다. 1억원까지 늘어났던 운전자보험의 변호사선임비용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린이 보험은 0~15세가 가입할 수 있는 상품과 15세 이상이 가입 가능한 청년 보험으로 세분화됐고, 단기납 종신보험의 환급률 100% 보장 시점은 5~7년에서 10년으로 변경됐다.
보험업계는 과열경쟁에 당국이 나서는 것은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실손보험 손해율 상승이나 백내장·도수치료 논란처럼 문제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우려가 예상된다는 이유만으로 상품 판매에 개입하는 것은 과하다는 반응이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최근 문제가 됐던 특약들은 판매실적으로 보면 핵심 특약이 전혀 아니었다”며 “실제 모럴 해저드가 발생한 사례들을 가지고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야지 그냥 과열이 우려된다는 말만 하는 것은 상품을 판매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당국의 자동차보험료 인하 압박에 대해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온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자동차보험 누적 적자액은 8조9869억원인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손해율이 반짝 개선되자 곧바로 보험료 인하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하다는 것이다. 자동차보험은 운전자라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보험료 인상·인하 여부가 서민들 지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사실상 당국이 보험료를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오히려 당국의 보험료 인하 압박이 자동차보험 시장의 독과점을 강화하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소형 보험사들은 손익분기점이 높아 대형 보험사보다 보험료가 비쌀 수밖에 없고 보험료 인하 여력도 적다. 여기에 보험료를 강제적으로 인하하면, 대형 보험사 위주로 가격이 내려가면서 이들의 가격 경쟁력만 더 강화된다.
삼성·현대·KB·DB손해보험 등 자동차보험 ‘빅4′의 시장점유율은 2020년과 2021년 84.7%로 동일했다. 하지만 보험료가 1.2~1.4% 내렸던 지난해에는 점유율이 84.9%로 증가했고, 2~2.5% 인하된 올해 상반기 점유율은 84.9%로 늘었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료를 낮추면 대형 보험사의 가격경쟁력이 더 높아지기 때문에 점유율도 높아지는 것”이라며 “상생 금융을 강조하면서 보험료 인하 이야기를 하는데, 자율시장 경쟁 체제에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이어 “손해율이 높았을 때는 ‘디마케팅’ 전략으로 점유율을 낮추려는 움직임이 있고, 손해율이 좋으면 점유율을 높이려고 하는 등 각 보험사가 상황에 맞게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부분이 있다”며 “이걸 인위적으로 조절을 하면 당연히 탈이 날 수밖에 없지 않냐”고 했다.
금감원은 보험상품 한도 설정 등은 보험사 자율이 원칙이라고 했다. 당국이 나서 각 담보별 한도를 일일이 제어하기는 불가능하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설명이다. 다만 특정 상품이나 특약을 두고 보험사들이 한도를 올리는 등 경쟁이 과열되면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간호·간병과 변호사 선임비용, 독감보험의 공통점은 한 회사가 담보를 올리니 다른 회사들도 따라 올리며 경쟁을 한 것”이라며 “마케팅 목적으로 한도만 올리고 내부통제 절차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부분을 보험업계에 전달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