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낸스는 올해 초 국내 5위 가상자산 거래소인 고팍스를 인수했지만, 아직 사업자 변경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국내 코스닥시장 상장사 시티랩스가 고팍스 지분을 인수한 배경에 대해 업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래픽=손민균

최근 코스닥시장 상장사인 시티랩스가 가상자산 거래소 고팍스의 주요 주주로 들어온 배경에 두고 가상자산업계의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고팍스의 최대 주주인 세계 1위 거래소 바이낸스가 국내 시장 철수를 염두에 두고 있어 시티랩스가 고팍스 지분 매입을 결정했다는 의견이 나오지만, 금융 당국의 사업자 허가를 받기 위해 내린 고육지책일 것이라고 보는 분석도 많다.

◇ 시티랩스, 고팍스 지분 8.55% 확보…추가 매입 전망

11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시티랩스는 지난달 총 54억원을 투입해 고팍스 운영사인 스트리미의 지분 8.55%를 확보했다. 유상증자를 통해 발행된 신주 5만9431주와 구주 1만6877주를 합쳐 총 7만6308주를 사들였다.

시티랩스는 지능형 교통시스템(ITS) 개발업체로 현재 코스닥시장에 상장돼 있다. 지난해 193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자회사인 케어랩스를 매각해 243억원의 반기 순이익을 거뒀다.

가상자산업계에서는 시티랩스가 고팍스 지분을 계속 사들여 최대 주주로 올라설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이미 블록체인과 메타버스 등 가상자산 관련 사업에 주력하겠다고 밝힌 데다, 자회사 매각을 통해 지분 추가 인수를 위한 실탄도 확보했기 때문이다. 시티랩스는 고팍스 지분을 매입한 데 이어 블록체인 전문 매체인 NBN TV까지 인수하며 최근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가상자산업계 관계자는 “유상증자를 통한 시티랩스의 고팍스 지분 인수는 최대 주주인 바이낸스와의 사전 교감 없이는 이뤄지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시티랩스가 추가로 발행되는 신주와 바이낸스 보유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최대 주주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세계 1위’ 입지 흔들리는 바이낸스…韓 철수 후 日에 집중?

바이낸스는 올해 초 국내 가상자산 진출을 위해 고팍스를 인수했다. 지난 3월 금융 당국에 가상자산 사업자(VASP) 변경 신고서를 제출했지만, 반년 이상이 지난 지금껏 승인을 받지 못한 상황이다. 금융 당국은 지배구조와 사업방식 등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바이낸스의 국내 진출을 허용할 경우 불법 자금 세탁 등 금융 범죄가 발생할 것으로 우려해 승인을 내주는 데 부정적 기류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오창펑 바이낸스 대표이사(왼쪽)와 박형준 부산광역시장이 지난해 11월 26일 디지털금융 육성을 위한 업무 협약을 맺고 기념 촬영을 갖고 있다. 바이낸스는 지난 2020년 바이낸스코리아를 설립했다가 철수한 후 지난해부터 부산시와 긴밀히 협업하는 등 꾸준히 국내 시장 진출을 타진해 왔다. /부산시 제공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였던 바이낸스의 입지는 최근 흔들리는 상황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데이터 분석업체인 카이코 자료를 인용해 바이낸스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올해 초 70%대에서 지난달 말 50%대로 하락했다고 전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리플 등 증권성 토큰의 거래를 중개해 연방 증권법을 위반했다며, 바이낸스와 최고경영자(CEO)인 자오창펑을 제소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일부 가상자산업계 관계자들은 이를 근거로 시티랩스의 고팍스 지분 인수가 바이낸스의 ‘엑시트(exit)’를 위한 결정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외국계 사업자의 국내 시장 진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금융 당국의 뜻을 확인한 상황에, 안팎에서 어려움을 겪는 바이낸스가 구태여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면서 한국에 목을 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바이낸스는 국내와 달리 일본에서는 성공적으로 안착한 상태다. 기시다 후미오 내각 출범 후 가상자산 시장에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해 온 일본 정부는 지난 8월 바이낸스 재팬의 설립을 승인했다. 업비트에 따르면 현재 바이낸스 재팬은 약 40종의 가상자산이 상장돼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국내 금융 당국의 사업자 승인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바이낸스가 일본 등 다른 아시아 시장에 집중하기 위해 시티랩스에 최대 주주 지위를 내 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 “사업자 승인 위한 우군 확보” 관측도

반면 바이낸스가 시티랩스를 주요 주주로 끌어들인 목적이 철수가 아닌, 금융 당국의 승인을 얻기 위한 또 다른 명분 쌓기 차원이라는 분석도 많다. 국내 기업을 최대 주주로 내세울 경우 더는 당국이 해외 사업자의 시장 진출을 막겠다는 목적에서 사업자 승인을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바이낸스의 전략이라는 해석이다.

시티랩스 입장에서도 바이낸스가 철수한 고팍스는 거액을 들여 인수할 만한 가치가 부족하다. 현재 국내 가상자산 시장 점유율은 업비트가 90% 이상을 차지하고, 5위권 업체인 고팍스의 점유율은 0.5% 수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고팍스는 고객에게 지급해야 할 약 600억원 규모의 예치금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앞으로 시티랩스가 고팍스의 최대 주주가 되고, 바이낸스가 2대 주주로 내려와 당국의 사업자 변경 승인까지 받을 경우 양측은 원하는 것을 얻을 가능성이 커진다. 바이낸스는 해외에 상장된 코인을 국내에도 상장시켜 새로운 시장을 확보할 수 있고, 시티랩스는 바이낸스가 가진 가상자산 관련 사업 노하우를 활용할 길이 열린다.

가상자산업계 관계자는 “바이낸스는 국내 시장 진출을 위한 통로가 목적이라는 점에서, 최대 주주 지위를 유지하는 데 크게 목을 맬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금융 당국이 국내 기업을 앞세우려는 바이낸스의 전략에 따라 쉽사리 사업자 변경 승인을 내줄 것이라 속단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