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건강보험’이라 불리는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 방안을 두고 의료계 반대가 거세다. 청구 절차가 간소화되면 보험사가 환자의 의료정보를 지금보다 수월하게 얻을 수 있고, 이 정보를 토대로 보험 가입을 거절하거나 보험료를 올릴 수 있다고 의료계는 주장한다. 반면 보험사 관계자들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 13일 전체회의를 열고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내용을 담은 보험업법 일부개정법률안 의결을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개정안은 오는 18일 다시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논의될 방침이다.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 권고로 탄생한 지 14년이 지났지만,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의료계가 주장하는 반대 논리를 근거로 개정안에 반대했다. 실손보험 간소화가 되면 보험사만 이익을 본다는 것이다. 박 의원은 “보험사들이 전자적으로 가공된 정보를 많이 축적하고, 이를 이용하면 많은 이익을 낸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이는 단순한 우려가 아니다”고 했다.
◇ 실손보험금 많이 청구하면 손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보험 가입자들이 요양기관(병·의원)에 요청해 실손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병·의원이 진단서 등 관련 서류를 전산화된 형태로 전송대행기관(중계기관)을 거쳐 보험회사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보험 가입자 입장에선 단순 요청만 해도 서류 접수가 자동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편리하다. 과거보다 실손보험금 청구 건수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현재는 환자가 보험금을 청구하려면 병·의원에서 서류를 발급받은 뒤 이를 직접 보험사에 제출해야 한다. 절차가 번거로워 청구를 포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의료계는 가입자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당장 보험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지만, 청구 건수가 많아질수록 보험사에 전달되는 환자 의료정보가 덩달아 많아지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보험사가 환자 의료정보를 지금보다 더 많이 축적하면, 이를 토대로 가입자를 고위험군과 저위험군으로 분류해 고위험군 가입을 차단하거나 보험료를 올려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보험업계는 보험상품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이라 보고 있다. 또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지급되지 않은 소액 보험금을 돌려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보험 가입 거절 사유로 활용될 가능성은 적다고 보고 있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보험금 청구가 늘어나면 지급할 보험금이 많아지니 보험료가 올라간다는 논리다”라며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면 당연히 지급해야 하는 게 보험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다른 손보사 관계자는 “중요 질병이나 큰 수술 이력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단기 소액 청구로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설명했다.
◇ 제공되는 정보는 똑같은데…전자화가 문제?
의료계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의 형태가 전자문서라는 점이다. 종이서류와 전자문서에 담긴 환자 의료정보는 모두 동일한데, 문서가 전자화되면 보험사가 정보를 데이터베이스(DB)화하는 게 쉬워져 문제라는 것이다.
전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 방안이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한 뒤인 지난 7월 “보험사와 금융위원회는 종이 기록이 전자 형식으로 바뀌는 것일 뿐이라 주장한다”며 “그것 자체가 큰 차이를 낳는다. DB화가 가능한 전자정보는 보험사가 체계적으로 축적·갱신해 활용하기 쉽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또 “보험사로 넘어가는 정보에 더 민감하고 세밀한 자료들이 포함될 수 있다”며 “소비자 편익은 늘기는커녕 더 줄어들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보험업계는 이미 환자 의료정보 등을 DB화하고 있어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다. 보험사는 현재도 접수되는 종이서류에 담긴 정보를 일일이 수기로 전자화시켜 DB를 만들고 있다. 이를 토대로 자체적인 데이터를 쌓아 보험료 산정에 활용하고 있다.
손보사 한 관계자는 “이미 수십년 동안의 데이터가 쌓여 있다”며 “청구 간소화로 데이터가 더 많이 온다고 해서 한국 사람이 특정 질병에 많이 걸린다는 결론이 뒤집히는 게 아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