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의 은행권 '내부통제' 강화 요구에도 수백억원대의 은행 횡령사고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뉴스1

은행 내부통제의 핵심인 상임감사를 금융감독원 출신이 독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데 은행 직원들의 거액 횡령 사고와 비리는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직원들의 거액 횡령과 부정행위가 적발된 우리은행과 국민은행, 대구은행, 경남은행 모두 전직 금감원 출신이 상임감사를 수년간 꿰차고 있다. 최근 10년간 은행권 상임감사 이력을 조사해 보니, 금감원 출신의 ‘감사직 싹쓸이 현상’은 더욱 심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권에서는 은행 상임감사를 금융감독원 출신이 독식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금감원과 은행권의 공생 관계가 대형 금융사고를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 KB국민·우리·대구·경남 등 사고 터진 은행...금감원 출신이 상임감사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직원들이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100억원대의 부당이득을 취한 사실이 드러난 KB국민은행의 경우 2022년부터 김영기 전 금감원 부원장보가 상임감사를 맡고 있다. 상임감사는 은행 내부통제 시스템을 총괄하면서 상시 감사업무를 수행한다. 사외이사로 구성된 감사위원회와 달리 상근직으로 회사에 출근해 감사 업무를 진행한다.

최근 10년 동안 KB국민은행은 한 차례를 제외하고 모두 금감원 출신을 상임감사로 영입했다. 2011년부터 박동순 전 금감원 거시국장이 상임감사를 지냈고, 2014년에 기획재정부 출신 정병기 전 상임감사로 교체됐다. 정 전 상임감사는 주전산기 교체 문제를 둘러싼 ‘KB사태’의 주요 인물로 지목되면서 이듬해인 2015년 자진 사퇴했다.

KB국민은행은 이후 상임감사를 공석으로 뒀다가 2018년 말 주재성 전 금감원 부원장을 선임했다. 이후 2022년부터 현재까지 김영기 상임감사가 재직 중이다.

최근 수백억원의 횡령 사고나 직원 비위가 적발된 은행 모두 금융감독원 출신이 상임감사를 맡고 있다. 왼쪽부터 김영기 국민은행, 양현근 우리은행, 황대현 경남은행, 구경모 대구은행 상임감사. /각 사 제공

지난해 700억원대 횡령사고가 발생한 우리은행의 상임감사도 양현근 전 금감원 부원장이 맡고 있다. 횡령 사고가 적발된 지난해에는 장병용 전 금감원 국장이 상임감사로 재직 중이었다. 우리은행 상임감사가 속한 감사위원회는 지원조직으로 82명의 검사실 조직을 두고 있었음에도 내부 감사에서 횡령 사실을 적발하지 못했다. 올해도 가상자산에 투자하기 위해 7만달러(약 9000만원)를 빼돌린 직원이 적발되기도 했다.

우리은행 상임감사는 과거 감사원 출신, 법조인, 금융인 등 다양한 직종에서 선임됐다. 장병용 전 상임감사가 우리은행의 첫 금감원 출신 상임감사다. 금융권에서는 우리금융지주(316140) 민영화 이후 금감원 출신 인사의 상임감사 싹쓸이 현상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같은 우리금융지주 산하에 있다가 BNK금융지주(138930)에 매각된 경남은행 역시 이런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경남은행의 상임감사는 지난 10년간 지역 경제인이나 금융권 인사가 맡아 왔다. 그러다 2022년 황대현 전 금감원 국장이 상임감사로 선임됐다. 우리은행과 비슷한 시기에 상임감사를 금감원 출신이 꿰찬 것이다. 최근 경남은행에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담당했던 직원의 600억원대 횡령 사고가 발생했는데, 역시 내부통제 시스템에서 걸러내지 못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우리금융 민영화 이후 정치권이나 지역 경제계 입김보다 감독 당국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는 방증이다”라고 했다.

◇ 신한·농협·대구銀 10년간 금감원 출신이 감사 독차지

직원들이 고객 문서를 위조해 1000여개의 계좌를 불법으로 개설한 대구은행도 최근 10년간 금감원 출신이 감사직을 독식하고 있다. 시기별로 2011년 정창모 전 팀장, 2015년 박남규 전 팀장, 2018년 변대석 전 국장 등이 연이어 상임감사를 맡았다. 2021년부터 현재까지 구경모 전 금감원 부원장보가 상임감사를 수행 중이다.

대구은행은 지난 6월 말 이미 직원들의 불법 계좌 개설 사실을 인지하고도 자체 감사만 진행하고 금감원에 보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금감원은 대구은행이 의도적으로 보고를 지연했거나 사건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조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찬우 신한은행, 민병진 하나은행, 고일용 농협은행 상임감사. 모두 금융감독원 출신이다. /각 사 제공

신한은행 역시 최근 10년간 금감원 출신이 상임감사를 독차지했다. 2011년부터 금감원 전략기획본부장(부원장보) 출신 이석근씨가 감사로 재직하다가 신한은행이 2014년 상임감사직을 신설하면서 자리를 그대로 보전받았다. 이후 2018년까지 약 8년간 감사직을 지켰다. 2018년 선임된 허창언 전 상임감사는 금감원 보험담당 부원장보를 지냈고, 올해 선임된 유찬우 상임감사도 금감원 부원장보 출신이다.

하나은행의 상임감사도 2015년 이후 줄곧 금감원 출신이 맡고 있다. 2015년부터 김광식 전 국장, 이주형 전 국장, 조성열 전 국장이 자리를 이어 왔다. 올해 초 선임된 민병진 상임감사는 은행담당 부원장보 출신이다.

농협은행 상임감사도 금감원 출신의 차지였다. 2014년 한백현 전 국장, 2016년 김영린 전 부원장보, 2019년 이익중 전 국장 등 모두 금감원 출신이다. 올해 초 농협은행 상임감사로 내정된 금감원 상호금융국장 출신 A씨가 공직자윤리위원회 취업 제한 판정을 받아 낙마하기도 했다. 농협은행은 금감원 출신 인사를 물색하다가 감사 자리를 2개월 동안 공석으로 뒀다. 결국 6월 고일용 전 금감원 실장을 상임감사로 영입했다.

금융권에서는 감독 당국 출신의 은행 감사 독점 행태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금감원 출신들은 이를 두고 금융 감독 전문성을 활용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지만, 금감원 출신들이 감사직을 독차지한 은행에서 대형 금융사고가 계속 터지자 이런 전문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은행들도 전관예우를 노리고 상임감사를 금융 당국과의 소통 창구로 활용하기 위해 금감원 출신들을 영입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시중은행에서 상임감사를 지낸 한 금감원 출신 인사는 “지금처럼 감독 당국 출신이 감사로 가기 전에는 시중은행은 주로 정부 측 인사, 지방은행은 주로 지역 정계 인사가 감사로 내려왔다”며 “금감원 출신이 감사직을 독식하는 지금의 관행을 개선하고 감사 선택의 폭을 넓힐 필요도 있지만, 낙하산 인사가 내려오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