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정부는 은행을 구제하는데 집중한 반면 2023년 SVB 파산 사태에서 미국 정부는 은행에 책임을 묻고 고객은 구제하는 대응 방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비즈DB

최근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과정에서 미국 정부와 금융 당국은 고객의 예금은 전액 지급하겠다고 밝혔지만, 은행은 구제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은행이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돈을 맡긴 사람은 정부가 나서서 보호하되 은행에 대해서는 투자 실패의 책임을 스스로 지도록 한 원칙을 지킨 것이다.

미국 정부의 이런 대응 방식은 지난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던 우리 정부의 조치와 사뭇 다르다. 당시 정부는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해 도산 위기에 처한 은행을 구제하는데 집중했다. 그 결과 대다수 국민은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은행은 살아남았다.

국민의 혈세로 기사회생했던 여러 은행은 인수합병(M&A)을 거치며 현재 대형 은행으로 탈바꿈했다. 국내 은행은 과점 체제를 구축하고 안정적인 예대마진(예금과 대출의 금리 차) 장사를 통해 매년 큰 수익을 거두고 있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은행의 과도한 수익에 대해 매서운 비판을 하고 있지만, 이는 결국 25년 전 외환위기 과정에서 은행을 살리는 데 주력한 당시 정부의 판단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 바이든 “이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법”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 연방예금보호공사(FIDC)는 지난 12일(현지시각) 공동성명을 내고 SVB와 뒤이어 파산한 시그니처은행의 예금자 돈 전액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보호 대상에 주주나 채권 매입자 등 투자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이날 백악관에서 가진 연설을 통해 “SVB에 돈을 맡겼던 모든 예금자는 보호를 받을 것이고, 투자자는 그렇지 못할 것”이라며 “이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미국 정부와 금융 당국은 SVB에 대해서는 파산에 이를 때까지 철저히 외면했다. SVB는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기간 넘치는 예금 자산을 주로 미국 국채에 투자했다가 기준금리 인상으로 채권 가격이 폭락해 결국 문을 닫게 됐다. 경영 판단 착오로 위기를 맞은 은행에는 혈세 지원 없이 책임을 묻겠다는 원칙을 고수한 것이다.

미국 정부의 이런 대응 방식은 지난 2008년 금융위기를 겪던 시절 은행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으로 결국 은행의 배만 불렸다는 비판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7000억달러(약 920조원) 규모의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많은 은행을 살리는 데 성공했지만, 도덕적 해이로 위기를 초래한 금융권을 위해 주식과 주택가격 하락으로 고통받는 국민을 외면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지난 14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위치한 실리콘밸리은행(SVB) 점포에서 고객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 1997년 韓, 은행에 공적자금 86조 투입…은행은 살고 국민은 고통

한국도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많은 은행이 부도 위기를 겪었다. 국내 수십개의 시중은행, 지방은행은 개인 고객의 예금을 받아 부실 기업에 대출을 해줬는데, 외환위기가 발생해 많은 기업이 쓰러지자 이들에게 돈을 빌려줬던 은행도 연달아 벼랑 끝으로 몰렸다.

현 미국 정부의 대응 방식과 대조적으로 당시 우리 정부는 은행을 구제하는 데 집중했다. 공적자금관리위원회에 따르면 1997년 11월부터 2002년 6월까지 정부와 금융 당국이 집행한 공적자금 규모는 총 156조7000억원에 달했는데, 이 중 절반이 넘는 85조9000억원이 은행을 지원하는데 투입됐다.

은행별로 보면 당시 제일은행에 가장 많은 13조3248억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갔고, 서울은행에도 5조원 가까운 돈이 지원됐다. 조흥은행 역시 2조7179억원의 나랏돈이 투입됐다. 한일과 상업, 한빛은행 세 곳을 합쳐 지원된 공적자금은 약 8조원이었다. 당시 5대 시중은행으로 꼽혔던 이들에 투입된 나랏돈만 무려 약 30조원에 달한 것이다.

외환위기로 여러 기업이 도산하고 국민이 몇 년간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는 동안 많은 은행은 회생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당시에도 정부가 관치금융과 방만한 경영으로 위기를 자초한 은행을 위해 국민의 혈세를 쓴다는 비판이 빗발쳤다.

1997년 11월~2002년 6월 국내 주요 은행별 공적자금 집행내역. /공적자금관리위원회

◇ 나랏돈으로 덩치 불린 은행…과점으로 돈 잔치 부작용

공적자금을 통한 살아남은 은행은 인수합병(M&A)을 통해 대형화됐다. 제일은행의 경우 1999년 미국계 사모펀드(PEF)인 뉴브리지캐피털로 매각됐다가 영국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인수돼 현재 SC제일은행이 됐다. 한일은행과 상업은행, 한빛은행은 1998년 하나로 합병됐고 이후 2002년 평화은행까지 합쳐 우리은행으로 재탄생했다. 서울은행은 2002년 하나은행에, 조흥은행은 2003년 신한은행에 각각 합병됐다.

외환위기 전 수십개에 달했던 국내 은행은 현재 소수의 대형 시중은행 체제로 재편됐다. 현재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이 4대 시중은행으로 꼽히며 NH농협은행과 SC제일은행 등이 있다. 지방은행 역시 전북은행과 광주은행, DGB대구은행, 경남은행, 부산은행 등만 존재할 뿐이다.

공적자금을 투입해 여러 은행을 살리고 대형화시킨 외환위기 당시 정부의 선택은 현재 소수 은행이 과점과 안정적인 예대마진을 통해 매년 대규모 수익을 거두는 결과를 낳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은행의 전체 당기순이익은 18조5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9.6% 증가했다. 이 가운데 이자 수익은 55조9000억원으로 전년보다 21.6% 늘었다. 큰 수익을 거둔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은 지난해 성과급으로만 전년 대비 32.9% 많은 2조원을 지급하기도 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기준금리 인상으로 많은 국민이 고통받는 사이 혈세로 살아남은 은행은 돈 잔치를 벌이고 있다”며 “위기를 맞았을 때 애꿎은 피해를 당하는 고객은 살리고 은행에는 경영 실패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현재 미국 정부의 방식이 정답이라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