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손지인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리플의 소송 결과가 이르면 이번 달 안으로 나올 것으로 예측되며 가상자산 업계가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리플은 한때 비트코인·이더리움과 함께 3대 가상자산으로 꼽혔다. 만일 리플이 패소하게 된다면 그와 비슷한 알트코인(비트코인·이더리움을 제외한 가상화폐)들은 무더기로 시장에서 퇴출당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전문가들은 대부분 리플의 소송 전략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시장에서 퇴출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11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미국 SEC가 리플랩스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결과가 이달 내 나올 전망이다. 미국 SEC는 지난 2020년 가상화폐 리플(XRP)을 미등록 증권 판매 혐의로 고소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해 발행사인 리플랩스는 리플이 증권이 아닌 상품이라고 반박하며 지금껏 법적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SEC는 리플에 대해 ‘타인의 노력으로 이익이 발생할 것을 기대하게 해서 투자자를 모았다’는 이유로 증권성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리플랩스와 SEC의 소송이 알트코인의 운명을 가를 중대 ‘분수령’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지난 10일 오후 2시 기준 리플의 시가총액은 약 189억9500만달러(약 25조2310억원)로 전체 규모 6위를 기록 중이다. 또한 많은 알트코인들이 리플의 구조, 사업 방식 등을 택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소송의 결과에 따라 리플 말고도 수많은 코인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업계에서는 이번 소송의 결과를 앞두고 긴장하는 모습이다.

◇ 전문가 “어느 쪽이 이겨도 놀랍지 않은 상황”

국내 전문가들은 리플 소송에 대해 양측 모두 뚜렷하게 승기를 잡았다고 보기엔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 애초 리플랩스가 소송에서 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의외로 리플랩스의 소송 전략이 잘 들어맞으면서 반전의 기회 또한 맞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SEC의 입장도 일리가 있기에 결국 소송의 향방은 판사 재량에 달렸다고 국내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리플랩스는 리플이 증권에 해당하더라도, SEC가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는 ‘공정고지위반(Fair Notice Defense)’ 전략을 펼치고 있다”며 “만약 리플의 주장을 판사가 받아들일 경우, 리플이 이길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공정고지위반이란 사전에 규제 당국으로부터 법적 위반 소지가 있다는 것을 고지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플랩스의 경우, 현재 존재하는 제반 법규와 판례로는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아 자체적인 증권성 판단이 어려웠다는 취지로 자신들을 변호해왔다. 또 지난 2015년 리플랩스가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FinCEN)로부터 XRP의 판매와 유통을 승인받은 것을 SEC가 알고 있었음에도 어떠한 고지를 받지 못했다고 항변해왔다. 쉽게 설명하자면 리플랩스는 SEC가 그동안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었음에도 뒤늦게 고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픽=손민균

다만 아직 리플 승소를 100%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SEC 역시 리플랩스 상대로 XRP의 증권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확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은 ‘하위 테스트(Howey Test)’에 따라 증권성을 판단하고 있다. 하위 테스트는 ▲투자자금(Investment of money) ▲공동의 사업(common enterprise) ▲타인의 노력이 반영되는지 여부(derived from the efforts of others) ▲수익이 창출될 것이라는 합리적 기대(reasonable expectation of profits) 등 4가지 기준으로 구성돼 있다.

현재 SEC는 리플랩스의 사업 구조가 하위 테스트 요건 중 일부를 충족한다며 이를 입증할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SEC는 리플의 증권성을 입증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며 호언장담한 상태다. 또한 미국 내 SEC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상황을 미뤄 짐작할 때, 법원이 SEC의 손을 들어줄 확률도 높다.

오유리 빗썸경제연구소 팀장은 “SEC 주장대로 과거 리플랩스가 반복적으로 리플의 유동성과 수요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 인정된다면 이는 하위 테스트 요건 중 ‘수익이 창출될 것이라는 합리적 기대’와 ‘타인의 노력’ 요건 등을 충족한다”고 분석했다. 오 팀장은 “이러한 부분을 법원이 받아들인다면 SEC가 소송에서 승기를 잡을 것”이라고 했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대 교수도 리플랩스의 과거 사업 등을 보면 증권과 비슷하게 운영된 점들을 볼 수 있다며, 이 부분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리플랩스는 자신들의 프로젝트에 자본을 조달하는 데 리플을 사용하거나, 증권에 리플을 얹어서 거래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이런 경우는 명백히 증권으로 사용된 사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 리플랩스 지면 알트코인 무더기 상폐 가능성

모든 전문가들은 소송의 승패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지만 결과가 어느 쪽으로 나더라도 그 후폭풍은 클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법원이 SEC 손을 들어주게 된다면 가상자산 시장의 침체기는 길어질 것으로 보이나, 리플랩스가 이기더라도 SEC가 이를 수긍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설명이다.

만일 리플이 지게 되면 리플과 비슷한 구조를 지닌 알트코인의 경우, 무더기로 상장폐지될 수 있다. 그 중 상폐 가능성이 큰 코인으로는 랠리(RLY), 앰프(AMP), 파워렛저(POWR) 등이다. 반대로 리플이 이긴다 하더라도 SEC의 입장이 워낙 강경해 항소하거나 새로운 혐의로 고소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홍 교수는 “리플이 만약에 지면 가상자산 시장에 ‘대혼란’이 올 수 있다”며 “일단 국내의 경우, 누군가 리플의 증권성을 판단해 달라고 금융감독원에 투서를 넣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금융당국이 미국의 판결과 반대되는 결론을 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논란은 리플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트코인을 포함한 모든 코인에 대한 증권성 검증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오 팀장 역시 “이번 판결 승패와 별개로 리플랩스와 SEC는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국내 규제 당국이 미국 규제 당국 기조를 따라가는 것을 고려할 때, 이번 소송 결과에 맞춰 국내의 증권성 판단 원칙에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