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이 5억달러(약 7100억원) 규모의 외화 신종자본증권(영구채)을 조기 상환하는 데 실패하면서, 외화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우려에 보험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흥국생명이 외화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권(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하면서 해외채 시장을 통해 자본성 증권을 발행하려던 일부 보험사들의 자금조달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사진은 3일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 본사 모습./연합뉴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3일 생명보험사 주요 관계자들을 불러 자금 조달과 운용 동향을 점검하는 간담회를 가졌다. 금융위는 전날 흥국생명의 외화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 불발 소식이 나온 후 “수익성과 실적은 양호하며, 보험금 지급과 채무 불이행 문제도 없을 것”이라며 진화에 나선 바 있다.

금융 당국이 하루 만에 서둘러 보험사들을 소집해 긴급 점검에 나선 것은 유동성과 자금 조달 문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데 따른 조처다.

흥국생명이 조기 상환을 포기한 신종자본증권은 주식과 채권 성격을 동시에 지닌 하이브리드 채권이다. 후순위 채권인 탓에 금리가 높게 산정되지만,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돼 금융기관의 자본 적정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올해 상반기 기준 흥국생명의 지급여력(RBC) 비율은 국내 생명보험사 중 가장 낮은 157.8%로 금융 당국의 권고치(150%)를 간신히 넘긴 상황이다. RBC 비율은 보험사의 요구자본에서 가용자본이 차지하는 비율로, 보험사의 재무 상황을 판단하는 지표로 활용된다. 흥국생명을 포함한 여러 보험사는 RBC 비율을 맞추기 위해 신종자본증권 발행을 통해 자본을 확충해 왔다.

보험업계에서는 외화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다른 보험사들에서도 흥국생명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란 우려가 늘고 있다. 이날 DB생명도 오는 13일로 예정된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 행사일을 내년 5월로 변경했다고 공시했다. DB생명이 연기한 신종자본증권은 지난 2017년 발행한 것으로 약 300억원 규모다.

또 한화생명과 KDB생명도 지난 2018년 발행한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 만기가 내년 상반기에 도래한다. 발행 규모만 각각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 2억달러(2800억원)에 달한다. 한화생명과 KDB생명 모두 해당 기간이 도래할 시기에 맞춰 갚겠다는 입장이지만, 흥국생명이나 DB생명과 똑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게 시장의 우려다.

한화생명은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을 위해 지난달까지 1조원 규모의 외화 신종자본증권 발행을 검토했으나, 발행 계획을 내년으로 잠정 연기한 상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보험사 관계자는 “신종자본증권은 영구채 형태로 발행돼도 통상 조기 상환이 관례로 여겨져 왔다”며 “흥국생명의 조기 상환 실패는 시장의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져 같은 방식의 자금 조달을 계획했던 다른 보험사들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지난 2일(현지시각) 기준금리를 0.75%포인트(p) 인상하는 이른바 자이언트 스텝을 또다시 단행하면서, 한국은행도 이달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밟을 가능성이 커졌다.

금리가 오르면 신규 채권을 발행하는 데 따르는 비용 부담이 늘어나고, 보험사들의 재무 건전성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흥국생명의 경우 기존 신종자본증권을 조기 상환을 한다면 연 4%대 금리를 지급하면 되는데, 최근 금리가 급등해 조기 상환을 위한 신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려면 연 12% 수준의 금리를 지급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동성 확보에 비상이 걸린 다른 보험사들도 신규 채권을 발행하는 데 따른 금리 부담이 급증할 수밖에 없다.

금융위원회 전경./뉴스1

다만 금융 시장 전문가들은 아직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불확실성이 크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정태준 유안타증권 애널리스트는 “한화생명과 KDB생명이 흥국생명과 비슷한 상황으로 갈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채권 신규 발행과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것은 맞지만, 6개월 뒤 시장 상황과 보험사들의 상환과 부실 가능성 여부를 지금은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보험업계 일각에서도 대다수 보험사가 자금 유동성과는 별개로 재정 건전성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행 RBC 제도의 효력이 올해 끝나고 내년부터는 신지급여력제도(K-ICS, 킥스)가 도입되면 보험사들이 보유한 채권의 평가이익을 재평가하기 때문이다.

노건엽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흥국생명의 경우 최근 채권 시장이 얼어붙어 새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지 못한 상황일 뿐 재정 건전성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에 킥스가 도입되면 부채를 시가로 평가할 수 있다”며 “시장 상황이 안정되면 보험사들의 채권 상환 능력도 높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