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루나 폭락 사태의 첫 번째 단계였던 ‘가치 연동 붕괴(디페깅·Depegging)’ 현상이 다른 스테이블 코인들에서 연달아 발생하고 있다. 달러화 가치에 그대로 연동되도록 만들었다는 스테이블 코인 알고리즘에 대한 불신이 커졌기 때문이다. 디페깅 현상은 은행 부실이 심해질 경우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몰려 돈을 인출하는 뱅크런(bank run)과 유사한 현상이다. 해당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한꺼번에 가격이 떨어지고, 스테이블 코인 자체가 휴지조각이 되는 방식이다.

가상자산 업계는 디페깅 현상이 발생하는 스테이블 코인이 늘어날 것으로 본다. 또 디파이(Defi·탈중심화 금융) 등 가상자산 시장 성장을 이끌었던 관련 사업도 몰락하거나 최소한 심각한 침체를 겪을 것이란 우려가 팽배하다. 가상자산 기반 비즈니스 중 상당수가 스테이블 코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예 가상화폐 시장에 ‘암흑기’가 도래했다는 의견마저 일각에서 나온다.

/그래픽=손민균

20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루나 사태 이후 가치 연동이 붕괴되는 스테이블 코인이 점차 늘고 있다. 스테이블 코인이란 보통 1코인 당 1달러에 연동되도록 ‘가치 유지(페깅·Pegging)’를 해둔 가상화폐를 의미한다. 스테이블 코인은 그 가치 연동 방식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눠진다. ▲루나클래식(전 루나코인)과 같이 알고리즘을 이용한 스테이블 코인, ▲가상화폐를 담보로 한 스테이블 코인, ▲테더와 같이 실물 자산을 담보로 한 스테이블 코인이 대표적이다.

다만 최근 트론(TRX), 웨이브(WAVES) 등 스테이블 코인의 가치가 연동이 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가상자산 업계에서는 통상 3% 이상 가치가 떨어지면 스테이블 코인의 안정성이 깨졌다고 보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1달러로 가치가 연동된 코인이 0.97달러 수준이나 그 이하로 내려가면 위험하단 의미다.

트론(TRX)의 스테이블 코인 USDD의 최근 일주일 간 가치 변화의 모습. 20일 USDD는 지난 13일부터 1달러 연동이 깨지기 시작해 현재는 0.95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코인마켓캡 캡처

현재 코인마켓캡 등에 따르면 트론의 스테이블 코인 USDD의 가격은 한때 0.92달러로 폭락했으나 현재는 올라 0.95달러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같은 기간 웨이브의 USDN은 0.98달러를 기록하고 있으나 카바의 USDX는 0.90달러로 그 가치가 폭락했다.

스테이블 코인의 하락이 이어지자 국내 거래소들도 그 대처에 나섰다. 앞서 업비트와 빗썸은 웨이브와 트론 투자에 유의하라는 공지를 발표한 바 있다. 코인원의 경우 트론 투자에 유의해야 한다고 공지했다. 국내 거래소 관계자는 “현재 USDN이나 USDD의 가치 연동 불안정으로 인한 시세 변동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다른 거래소들도 역시 ‘투자 유의’ 지정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업계에서는 디페깅 현상이 다른 스테이블 코인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USDN과 USDD의 경우, 테라폼랩스의 루나클래식과 비슷한 알고리즘을 채택해 언제 폭락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실물 자산에 담보한 스테이블 코인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설명이다.

스테이블 코인이 무너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한 뒤, 가치를 유지하는 사업자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서다.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가 발행한 루나클래식이 하루만에 90% 이상 폭락하며 코인이 휴지조각으로 전락하자, 이와 같은 현상이 다른 코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졌다. 다른 스테이블 코인 발행자들도 가치 유지 알고리즘이 제대로 작동하는 지 알 수 없고, 정보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코인을 발행한 사업자들은 대개 코인 담보 대출 등 여러 디파이 프로젝트에 깊은 연관이 있다. 디파이 프로젝트가 흔들릴 경우 스테이블 코인 사업자도 보유 자산이 쪼그라들 위험이 있다. 최근 이더리움이 큰 폭으로 하락하자 미국의 코인 대출 전문 기업 셀시우스는 ‘인출 중단’을 선언한 바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 실물자산 담보 스테이블 코인 모두 시장 신뢰를 잃으며 페깅이 깨지고 있다”며 “아마 가상자산 시장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대장 격 코인들의 폭락 현상으로 가상자산 시장이 실험대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며 “지금 시기는 스테이블 코인이 줄줄이 무너지는 가상자산의 ‘암흑기’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스테이블 코인 문제 등 가상자산 업계 문제가 상당 기간 이어질 거란 비관적인 관측도 업계 일각에서 나온다. 금리 인상으로 위험자산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자 덩달아 가상자산 역시 시장의 선택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믿을 수 있는’ 코인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이들보다 안정성이 떨어지는 알트코인(비트코인을 제외한 나머지 가상자산)에 대한 불신도 커져가고 있다. 업계에서는 시장 신뢰도가 회복하지 않으면 ‘코인런(대규모 코인 인출)’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가상자산 시장 규모는 약 3380조원을 기록했으나, 이는 현재 1144조원으로 내려앉으며 반년 만에 그 가치가 3분의 1 수준으로 하락했다.

가상자산 전문 분석 업체 쟁글의 전대은 매니저는 “금리인상, 물가상승 등 여러 거시적인 요인으로 유동성이 큰 자산에 대한 선호가 떨어지고 있다”며 “악재가 잇달아 터지면서 가상자산 시장은 ‘생존의 시간’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어 그는 “이번 하락장을 시작으로 기존의 변별력 없는 코인이나 프로젝트는 살아남지 못할 확률이 높다”며 “가상자산 시장의 ‘옥석 가리기’를 통해 살아남은 코인만이 그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