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와 위생용품 등이 빼곡히 쌓인 마트 매대 사이로 들어가면 안내 로봇인 ‘로봇 컨시어지’가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한다. 상주하는 직원은 없지만, 여느 은행 점포처럼 번호표 발급기계와 입·출금 창구(스마트키오스크) 등이 존재한다. 번호표를 뽑으면 화상상담창구인 디지털데스크에서 인공지능(AI) 은행원이 처리해주는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다.
지난달 29일 신한은행이 GS리테일과 함께 이달 선보인 ‘슈퍼마켓 혁신점포’ GS더프레시 광진화양점을 찾았다. 건대입구역 1번 출구에서 약 5분 거리에 있는 이 은행 점포는 원래 하루 2000명이 넘는 손님이 찾는 대형 마트다. 신한은행은 은행 업무 시간 방문이 어려운 2030세대를 타깃으로 하고, 고객들이 장을 보면서 쉽게 은행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이곳에 혁신점포를 만들었다.
신한은행 GS더프레시 광진화양점에서는 거래내역 확인, 인터넷뱅킹, 예·적금 등 기본적인 업무에서부터 대출·펀드·신탁·퇴직연금 등 창구 상담이 필요한 업무까지 처리할 수 있다. 디지털데스크 속 본점 디지털영업부 직원과의 화상 상담을 통해서다. 해당 업무는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간단한 업무를 처리하는 스마트키오스크는 24시간 이용 가능하다.
◇ 신한은행 외에도 하나는 CU, KB는 이마트와 협업
금융의 디지털 전환과 영업 비용 절감 등의 이유로 은행 점포 폐쇄가 가속화되자 은행들이 새로운 활로 찾기에 나서고 있다. 기존 방식과 다르게 영업시간을 특화하거나, 우체국·편의점과 같이 다른 업계와 제휴해 점포를 만드는 방식 등이다.
하나은행도 지난해 10월 업계 최초로 CU와 손잡고 ‘CU마천파크점×하나은행’을 선보였다. 약 50여평 규모의 편의점 공간 중 약 12평의 공간에 마련된 하나은행 스마트 셀프존엔 STM(스마트텔러머신·Smart Teller Machine)과 CD(현금인출기·Cash Dispenser)기가 각각 1대씩 설치됐다. 이 편의점은 하나은행 CU마천파크점으로 전환한 뒤 매출이 약 20%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STM은 일반 ATM(현금자동인출기) 기기에서 가능한 입출금, 통장정리 등의 기본 업무는 물론 화상 상담 등을 통해 영업점을 가야만 처리할 수 있었던 계좌 개설, 통장 재발행과 같은 업무를 볼 수 있는 기기다.
KB국민은행은 이마트와 제휴한 ‘KB디지털뱅크 NB강남터미널점’을 올 상반기 안에 열 예정이다. 서울 강남 고속터미널역에 있는 노브랜드(NB) 강남터미널점에 STM과 화상상담 전용 창구를 배치해 영업점 수준의 업무처리가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DGB대구은행도 세븐일레븐과 손잡고 대구에 금융특화 점포를 선보일 계획이다.
◇ ‘한 지붕 두 은행’ 공동 점포부터, 저녁 시간 운영·초소형 무인점포까지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이 경기 용인시에 은행권 최초로 선보인 공동점포도 같은 맥락이다. 경쟁 업체가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것이 비용 등에서 오히려 ‘윈윈(win-win)’이 된 것이다.
선도 은행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도 지역별 공동점포를 열기로 했다. 영업점 수가 상대적으로 전은 KDB산업은행은 전국의 하나은행 지점과 ATM기기를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공간뿐 아니라 시간 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신한은행은 다음 달부터 직장인을 겨냥해 평일 저녁(오후 8시)과 토요일에도 업무를 처리하는 ‘이브닝플러스’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기존 영업시간인 오후 4시 이후와 토요일에는 디지털영업부 직원 화상상담창구인 디지털데스크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앞서 KB국민은행은 직원을 오전조와 오후조로 나눠 오후 6시까지 운영하는 ‘나인투식스 뱅크(9To6 Bank)’를 운영하고 있다.
아예 영업 직원을 없앤 곳도 있다. 우리은행은 점포 폐쇄의 대안으로 ‘초소형 점포’를’ 제시했다. 우리은행 ‘디지털 EXPRESS점’은 디지털데스크, 스마트키오스크, ATM 등 디지털기기 3종으로 구성된 무인점포다. 지난해 말 폐쇄된 문산, 우이동, 구일지점 위치에 열었다. 화상상담 직원을 통해 지점 창구 수준의 업무를 볼 수 있고, 예금신규·카드발급 등 대부분의 업무처리가 가능하다.
◇ 은행 점포 폐쇄 가속화… 인수위도 “우체국서 은행 업무 보게 하자”
은행들이 최근 다양한 실험에 나서기 시작한 배경에는 점포 통폐합이 있다. 한 은행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라 사회 전반적으로 디지털·비대면화가 확산하면서 영업점을 찾는 고객이 줄었고, 대면 영업을 유지할 때 발생하는 비용이 더 커지게 됐다”며 “디지털 금융 소외 계층을 챙기는 동시에 운영 효율화를 위해 혁신·탄력 점포를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시중 은행들은 현장 점포를 빠르게 줄이고 있다. KB국민은행을 비롯해 신한은행, 우리은행은 오는 7월 안에 총 55개의 지점을 폐쇄·통합할 예정이다. 하나은행도 지난 상반기 수준의 지점 통폐합을 올 하반기에 검토하고 있어, 앞으로 폐쇄 점포 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들 4개 은행이 올 4개월 동안 통폐합한 지점 수는 146개에 이른다.
이에 차기 정부의 밑그림을 그리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도 공동점포 방안 논의에 뛰어들었다. 인수위는 우정사업본부와 우체국을 통해 4대 시중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금융위원회는 올 초부터 우정사업본부, 은행연합회, 4개 시중은행 등과 이러한 내용을 포함한 실무 협의를 이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