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비자가 미국 룰루레몬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요가복을 골라 장바구니에 담는다. 곧 주소 입력창이 뜨면 옆에서 ‘어떻게 결제하겠느냐’고 묻는다. 익숙한 신용카드사 이름 대신 페이팔 같은 간편결제 플랫폼이 보인다. 그런데 이전에 페이팔 아이콘이 있던 자리에는 생소한 이름이 보인다. ‘클라르나(Klarna)’와 ‘애프터페이(Afterpay)’다.
클라르나(Klarna)와 애프터페이(Afterpay)는 둘 다 ‘선구매 후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핀테크 기업이다. 영어로는 ‘Buy Now, Pay Later’의 약자를 따 ‘BNPL’ 서비스라 불린다.
소비자가 BNPL 방식으로 결제하면 결제 업체가 가맹점에 먼저 대금을 지불하고, 소비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결제 업체에 돈을 갚게 된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룰루레몬에서 30만원짜리 요가복을 사고 싶지만 당장 돈이 없는 소비자라면, 클라르나나 애프터페이 같은 BNPL 결제 업체를 이용해 물건을 먼저 사면 된다. 대금은 소비자가 결제 버튼을 누르는 즉시 클라르나나 애프터페이가 가맹점에 전액 지급한다.
언뜻 들으면 “신용카드와 뭐가 다른데?”라고 생각할 수 있다. BNPL은 소비자 신용등급이 필요 없다. 발급과 한도 설정을 위해 까다로운 신용 조건을 요구하는 신용카드와 달리 18세 이상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또 신용카드로 할부 서비스를 이용하면 꽤 높은 할부 수수료가 붙지만, BNPL은 따로 수수료도 없다.
BNPL 업체는 소비자에게는 신용등급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심지어 수수료도 받아 챙기지 않는다. 대신 가맹점에서 높은 수수료를 받아 수익을 올린다. 보통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가 1~2% 초반 수준이라면 BNPL 업체들은 가맹점 수수료를 5~7%까지 받는다.
룰루레몬, 아디다스, 월마트 같은 가맹점들은 두 배가 넘는 수수료를 물어가면서도 BNPL 결제를 도입했다. 돈과 신용등급은 없지만, 구매 욕구만큼은 누구보다 강한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 소비자들이 BNPL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BNPL을 잡아야 MZ세대가 지갑을 연다는 뜻이다.
특히 신종 코로나 사태 이후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자 MZ세대를 중심으로 BNPL 사용자는 급증하고 있다. 2005년 설립한 스웨덴의 BNPL 플랫폼 클라르나는 미국 내 2000만명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9000만명을 사용자로 확보하며 선두주자로 치고 나섰다.
애프터페이는 호주를 중심으로 1000만명이 사용한다. 세계 최대 간편 결제 기업 페이팔이나, 전통적인 신용카드업계 강자 아메리칸익스프레스 같은 대기업들이 클라르나와 애프터페이를 뒤따라 갈 정도로 판이 바뀌었다.
BNPL의 저력은 ‘전 세계 최대 쇼핑 행사’라는 블랙프라이데이에서도 드러났다. 댄 슐먼 페이팔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11월 “올해 블랙프라이데이 기간 BNPL 사용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00% 늘어났다”며 “블랙프라이데이 당일에만 75만 건이 넘는 BNPL 거래를 처리했다”고 밝혔다.
다만 편리한 만큼 ‘빚’이라는 인식을 못 느끼게 하고, 갚을 능력을 넘어서는 소비를 부추긴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미국 자산관리 플랫폼 크레딧 카르마(Credit Karma) 조사에 따르면 BNPL 사용자 가운데 3분의 1은 결제 시기를 놓쳤고, 그중 72%는 신용점수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미국 소비자금융보호국(CFB)은 BNPL 결제 업체 서비스가 가진 위험요인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지난 16일 CFB는 “소비자들이 BNPL을 통해 빌린 돈을 제대로 갚을 수 있는 지 사실상 불확실하다”며 “BNPL 관련 규제와 공시제도 준수 여부, 업체들의 데이터 수집 등을 조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뿐 아니라 영국 역시 재무부가 앞장 서 업체들과 BNPL 규제안을 놓고 논의 중이다. 클라르나의 본고장인 스웨덴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직불카드나 신용카드에 앞선 결제수단으로 BNPL을 설정할 수 없도록 직접적인 규제에 나섰다.
이에 대해 미국 경제 금융 전문 TV 채널인 CNBC는 전문가를 인용해 “앞으로 나올 관련 규제가 BNPL 성장성을 둔화시킬 수 있다”고 평가했다.
국내에서는 일부 빅테크사가 선제적으로 BNPL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만큼 폭발적인 반응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네이버파이낸셜은 지난 4월부터 네이버페이 가입자 일부를 대상으로 ‘후불결제’를 시범 서비스 중이다. 월 최대 30만 원까지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후불결제가 가능하다.
쿠팡 자회사 쿠팡페이도 로켓와우 멤버십 회원 가운데 일부를 대상으로 ‘나중결제’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월 50만 원 한도이며, 다음달 15일까지 일괄 지불하는 방식이다.
카카오페이는 올해 안으로 충전금 없이 월 최대 15만 원까지 후불 결제가 가능한 모바일 교통카드를 출시할 계획이다. 토스뱅크는 내년 3월 중 관련 서비스를 선보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고은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BNPL 서비스는 소비자에 할부 이자나 수수료를 부과하지 않아 소비를 촉진시키는 반면, 가맹점에 높은 결제 수수료를 부과해 최종 상품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서비스 이용자들의 채무상환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할부 거래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부채를 증가시켜 장기적으로 경제 기반을 흔들 수 있는 위험 요소를 감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