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소득과 담보만을 바탕으로 돈을 빌려주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핀테크뿐만 아니라 전통 금융사들까지 신용도가 낮은 새 고객군 발굴에 적극적이다. 은행은 중·저신용자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용평가모형을 진화시키고, 이에 활용할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배달 애플리케이션(앱)처럼 뜬금없어 보이는 비금융플랫폼까지 선보이고 있다. 신용점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구매하고 나서 나중에 지불할 수 있도록 하는 후불 결제 서비스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전통적 의미의 신용도에 균열이 생긴 셈이다. 전통을 벗어나려는 금융사의 시도는 여러 방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점포를 없애는 대신 메타버스나 편의점 같은 이색 공간에 창구를 만들고, 골칫덩이로 취급하던 가상자산 시장에 대해선 시각을 바꿔 새 사업 영역으로 삼는 분위기다. 2022년 금융업계가 주목하는 뉴트렌드를 5편으로 정리해 봤다.

우리나라에 KCB(코리아크레딧뷰로)·NICE(나이스) 점수라는 국민 신용점수가 있다면, 미국에는 ‘파이코 점수’(FICO Score)가 있다. 파이코 점수는 미국 은행 대출의 약 90%가 의존할 정도로, 그간 미국 금융사들이 대출 심사를 할 때 가장 신뢰해 온 지표 중 하나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파이코 점수의 신뢰도는 시험대에 올랐다. 상환 이력 정보에 초점을 맞춰 산정되는 파이코 점수가 사회 초년생이나 흑인·히스패닉계 미국인 등 금융 소외 계층의 ‘진짜 신용도’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해, 약탈적 금융으로 내몰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다.

미국 주요 금융사들은 점차 파이코 점수에서 손을 떼는 추세다. JP모건·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미국 1·2위 은행은 과거보다 파이코 점수를 제한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일부 금융사들은 최근 아예 파이코 점수를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신용점수를 매기는 신용평가모형(CSS·Credit Scoring System)을 금융사 자체적으로 수정하거나, 비금융 데이터와 AI(인공지능) 기술이 접목된 CSS를 운영 중인 핀테크 업체와 연계해 대출의 기회를 넓히는 변화를 보인다.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총량 규제를 가하는 동시에 중·저신용자 대출 확대는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정책적 특수성 탓에, 전통 금융사들마저 적극적으로 CSS 개발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대출 시장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하는 은행들에 ‘신용평가 차별화’는 2022년 주요 과제가 될 전망이다.

개인 신용점수 조회 화면의 모습. /박소정 기자

◇ ‘낡은 신용평가 타파’는 세계적 추세

미국은 핀테크 업체 주도로 개발한 CSS가 급부상하고 있다. 2020년 나스닥에 상장해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는 ‘업스타트’(upstart·업체명 업스타트홀딩스)가 대표적이다.

업스타트에서 소비자가 자신의 소득 정보와 금융거래 내역 등을 입력하면, 이를 토대로 AI가 신용도를 분석하고 은행 등 금융기관의 대출 상품을 추천해준다. 업스타트는 신용정보보고서에 기재된 상환이력 정보뿐만 아니라, 약 1000개 이상의 데이터 정보를 함께 분석한다. 통상 5~8개 정도의 금융 정보를 분석하는 전통 금융사와 비교되는 모습이다.

업스타트의 CSS에선 개인의 대학·전공 등 교육 수준이나 고용 기록, 생활비, 통신 비용 등이 함께 고려된다. 예를 들어 간호사란 직업을 가진 대출 신청자의 경우, 실직자가 거의 없는 직군이기 때문에 신용도가 유리하게 책정될 수 있는 식이다.

등록금이 비싼 뉴욕 사립대학교에 다니면서 큰 빚을 지게 돼 은행들에서 대출이 거절된 고객이, 업스타트에선 해당 대학교에서 공부한 이력 등 교육 수준이 긍정적으로 평가돼 대출이 이뤄진 사례도 있다.

미국의 핀테크 업체인 업스타트(upstart)의 사무실 모습. /업스타트 홈페이지

업스타트는 이런 신용평가를 기반으로, 뉴저지 금융기관인 크로스리버뱅크(Cross River Bank) 등 30개 이상의 대출 기관에 대출을 중개해주고 있다. 전통 CSS를 적용했을 때보다 27% 더 많은 대출 승인이 이뤄졌고, 차주들이 지불한 평균 이자율은 16%가량 낮아졌다.

스탠퍼드대 졸업생이 재학생에게 낮은 금리로 학자금을 빌려주는 중개 플랫폼으로 시작해 은행 라이선스까지 획득한 ‘소파이’(SoFi),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친구·포스팅 등 평판 데이터를 활용하는 ‘렌도’(Lenddo) 역시 대안 신용평가를 활용하는 미국의 대표 핀테크 기업으로 꼽힌다.

공인된 신용평가 척도가 없는 국가의 경우 더욱 이색적인 평가모델이 사용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나이지리아·케냐·가나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싱가포르 기반 핀테크 기업 크레도랩(CredoLab)은 소비자의 스마트폰 사용 행태가 신용점수 생성에 활용된다. 휴대폰에 있는 셀카(Self camera) 비율, 설치된 게임 수, 월별 생성 동영상, 자판 입력 속도 등이 대출 신청 시 수집돼 분석되는 식이다.

중국에선 알리바바 자회사인 앤트파이낸셜(蚂蚁金服)의 ‘즈마크레딧’(즈마신용·芝麻信用) 점수가 준정부 수준 지위의 신용평가로 취급되고 있다. 알리바바를 통해 수집된 온라인 거래나 교통 신호 위반 이력, 세금납부 내역 등의 빅데이터가 자료로 활용된다. 가령 기저귀를 사는 사람은 유흥비로 돈을 쓰는 사람보다 더 책임감 있는 소비를 하는 것으로 인식해 더 높은 점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식이다.

중국 알리바바 자회사인 앤트파이낸셜(蚂蚁金服)의 ‘즈마크레딧’(즈마신용·芝麻信用) 애플리케이션(앱)의 모습. /중국 인터넷매체 ‘식스톤(Sixthtone)’ 홈페이지 캡처

◇ 은행부터 스타트업까지… 한국도 신용평가 개발 봇물

우리나라도 CSS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인터넷전문은행과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체(P2P·개인 간 대출) 등이 대출이 가능한 금융소외 계층 발굴을 위해 CSS 시장에서 선두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눈에 띄는 건 최근 은행 등 전통 금융사의 적극적인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우리 금융당국의 기조도 한몫했다. 금융당국은 가계대출 총량 규제를 엄격히 적용해 관리하고 있다. 금융사들은 과거보다 고신용·고소득자에 집중해 제한적으로 대출을 내주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금융당국은 동시에 포용금융 확대 정책의 일환으로 중·저신용자 대출 확대를 주문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은행 등은 대출 시장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대출이 가능한 중·저신용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들의 승인율을 높이기 위해 CSS를 고도화해야 하는 것이다.

국내 리딩뱅크인 KB국민은행도 2022년 역점사업으로 CSS 개발을 꼽고 있다. 이재근 신임 국민은행장은 “가계대출 성장 제한은 우량 고객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7등급 이하 저우량 고객에게는 그 한도가 열려 있다”며 “CSS를 정교화해 7·8등급 고객도 발굴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 은행 간 성과 차별화 요소가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국민은행은 최근 비금융 정보를 활용하는 ‘대안’ 신용평가(ACSS·Alternative-CSS) 모델을 개발할 업체 용역 공고를 냈고, 2022년 상반기 중으로 이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다수의 금융사가 모여 금융·비금융 데이터 협업을 통해 개인사업자를 대상으로 한 새 신용평가모형 개발도 추진되고 있다. 한국신용데이터·카카오뱅크·국민은행·전북은행·현대캐피탈·웰컴저축은행·현대캐피탈 등은 ‘데이터 기반 중금리 시장 혁신준비법인’을 준비하고 있다. 건강보험료 납부 내역, 연말정산 등 공공 비금융 데이터를 접목한 신용평가모델을 개발하고, 이를 다른 금융사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이색적인 CSS도 조금씩 출현하는 추세다. 카카오뱅크는 교보생명·문고·증권 등 교보 3사와 업무 제휴를 맺고, 도서 구매 이력 같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대안 신용평가 모델을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국내에서 16년 만에 인가된 신용평가(CB)업자로서 1호 비금융 CB사가 된 핀테크 기업 ‘크레파스솔루션’은 스마트폰 충전 주기, 운영체제(OS) 업데이트 주기, 애플리케이션(앱)·인터넷 사용 시간, 메시지 수신 대비 발신 비율 등을 성실성의 척도로 평가해 신용평가에 활용하고 있다.

그래픽=손민균

◇ 전망 밝지만 차별·사생활 침해 문제 등 고민해야

금융당국의 CB업 시장 활성화 의지가 더해지면서, CSS 개발 경쟁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관 곳곳에 흩어진 개인 정보를 한데 모아 볼 수 있는 마이데이터(본인신용정보관리업) 시대도 본격화하면서, 빅데이터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됐다. 전문가들은 “대안 신용평가가 미래의 신용평가모델이 될 것”이라며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다.

다만 한계나 우려되는 점도 있다. 인간의 행동은 가변적이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는 대안 신용평가가 지속적인 고도화나 검증을 거듭하지 않으면 ‘잠재적 편향’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탓에 대안 신용평가는 독자적으로 사용되기보다 전통 신용평가와 함께 활용돼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동시에 이는 차별 문제로도 이어질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차별을 막기 위해 성별·인종·지역·나이에 대한 신용점수를 사용하지 못하게 돼 있다. 더불어 SNS 등을 통해 데이터가 취합될 경우 사생활 침해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이에 대한 활용 원칙 마련 등의 고민도 수반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