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가 인지능력이나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극단적인 선택으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 법원이 보험금 지급 대상으로 판단하는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자살 면책 제한 조항’에 따라 극단적인 선택으로 사망한 보험 가입자는 사망 보험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는데, 보험사의 면책 범위를 좀 더 좁게 해석한 것이다.

19일 보험연구원의 간행물 ‘보험법리뷰’ 14호에 실린 ‘2021년 보험 관련 중요 판례 분석’ 보고서에는 이같은 내용이 담겼다. 그 예로 지난 2월 대법원이 우울증 환자의 자살 때 보험사의 면책을 제한하는 등 가입자(피보험자)에게 유리하게 판시했다는 점을 들었다.

앞서 이 재판의 원고는 우울증을 앓다 극단적 선택으로 숨진 초등학교 교사 A씨의 유족(아버지)으로 “딸이 정신질환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했다”고 주장하며 공무원 단체보험에 보험금을 청구했다.

A씨는 2006년 학부모로부터 폭언을 듣고 우울증 증상을 처음 겪은 후 2008년부터 매년 가을 치료를 받았으나 2011년 10월 우울증이 재발한 상태에서 피부·간 질환 등 질병으로 입원을 반복하던 중 극단적 선택으로 숨졌다. A씨가 가입한 보험의 약관은 자살을 보험사의 면책 사유로 규정하나, ‘피보험자가 정신질환 또는 심신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는 면책에서 제외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이전까지 법원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매우 엄격하게 해석했다. 극도의 흥분이나 불안으로 정신적 공황 상태 또는 몸을 가눌 수 없는 만취 상태에서 투신하거나, 정신질환에 따른 망상으로 자해를 하는 경우 등이 이런 상태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이 사건 1심과 항소심 역시 원고의 요구를 기각한 바 있다. A씨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면서다. 사망 당일 행적이나 극단 선택의 시기·장소·방법 등을 종합해볼 때 A씨는 자기의 생명을 끊는다는 것을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자기의 생명을 끊어 사망의 결과를 발생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주치의가 A씨의 증상이 주요우울장애(우울증)에 해당하고 사망 당시 인지 왜곡 증세를 보였다고 진단한 점 ▲주요우울장애와 자살의 관련성에 대해 의학적 판단 기준이 확립된 점 ▲공무원 공단을 상대로 한 유족보상금 청구 소송에서 A씨가 우울증으로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떨어져 극단 선택에 이르게 됐다고 판단한 점을 근거로 A씨의 자살이 보험사의 면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다만 당시 보험금 청구권 소멸시효는 2년이었는데, 원고가 이 기간이 지나 보험금을 청구했다는 이유로 보험금 청구는 최종 기각됐다. 지금은 이 법이 바뀌어 현행 보험금 청구권 소멸시효가 3년이다.

황현아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판례와 최근의 유사 판례는 우울증 심화로 정신적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자살에 이른 경우를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 해당한다고 봤다”며 “자살 면책 제한 조항의 문언과 취지를 고려한다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는 자살에 대한 ‘인식’이나 ‘의사’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좁게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